“호주 퇴직연금, 디폴트 제도 도입해 자동으로 상품 선택”

윤영호 기자

입력 2019-06-08 03:00 수정 2019-06-0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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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M인베스터스 메이 전무
27개 퇴직연금 기금 모여 설립, 전세계 인프라 투자 강점 지녀
기금형 제도, 외부 기관에 맡겨… 전문가 운영 참여해 고수익 올려
국내 도입 위해 개정안 국회에


“디폴트 제도를 적극 도입해야 한다.”

서울 중구 태평로 서울파이낸스센터에서 3일 만난 호주 자산운용사 IFM인베스터스 재커리 메이 전략 및 정책 담당 전무는 “한국 정부가 도입을 추진 중인 퇴직연금 기금형 제도의 성공 조건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디폴트 제도란 연금 가입자가 특별한 의사 표시를 하지 않으면 미리 설계된 프로그램에 따라 자동으로 선택이 이뤄지는 것을 말한다.

메이 전무는 퇴직연금 전문가다. 올 2월 IFM인베스터스에 합류하기 전까지는 호주의 산업형기금 15개가 만든 협의체인 ISA에서 7년 이상 정책이사로 일했다. 인프라 투자에 특히 강점을 가진 IFM인베스터스는 호주의 퇴직연금 기금 27개가 설립한 자산운용사다. 말하자면 이들 기금 27개는 이 회사의 고객이자 주주인 셈이다.

호주는 퇴직연금 기금형 제도 운영이 잘되는 국가로 손꼽힌다. 기금형 제도란 회사 외부에 단독으로 또는 다른 회사와 연합해 설립한 수탁법인이 퇴직연금 적립금을 운영하도록 하는 제도다. 수탁법인 이사회에 전문가가 참여함으로써 기금 운용의 전문성을 확보할 수 있다.

한국도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4월 기금형 제도 도입을 위한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상태다. 메이 전무의 방한은 한국금융투자협회가 올가을 개최할 예정인 기금형 제도 콘퍼런스에 대한 사전 협의 차원이었다.

메이 전무는 호주에서는 우선 퇴직연금에 가입하는 단계에서 디폴트 제도에 따라 기금 선택을 한다고 설명했다. 가령 건설업체에 취업한 경우 특별한 의사 표시를 하지 않는 한 자동으로 건설업체들의 디폴트 기금인 시바스슈퍼를 선택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물론 처음에 시바스슈퍼에 가입했다가 나중에 다른 기금으로 옮기는 것도 가능하다.

호주에는 5월 말 현재 대기업이 단독으로 설립한 기업형 기금 20개, 동일 업종 내 기업들이 연합해 설립한 산업형 기금 37개, 공공기관이 설립한 공공부문 기금 37개 등이 있다. 이 기금들을 관리하는 수탁법인은 비영리 기관이다. 이와 달리 은행 등 금융기관이 설립한 소매형 기금 115개는 영리 법인이 운영한다.

호주 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디폴트 기금 가입자들의 2006∼2017년 평균 수익률은 7.29%인 반면에 다른 기금을 선택한 가입자들의 같은 기간 수익률은 6.45%였다. 메이 전무는 또 “기금 선택제를 활용한 가입자들 가운데 49%는 수수료 등 비용이 더 높은 기금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는 “가입자들이 비용이 낮고 성과가 좋은 기금을 선택하게 함으로써 기금 간 경쟁을 유도하려던 기금 선택제의 원래 취지가 무색해졌다”고 설명했다.

호주의 가입자들은 적립금을 운용하는 단계에서도 디폴트 제도의 혜택을 받는다. 각 기금이 감독 당국의 인가를 받아 내놓은 디폴트 상품인 마이슈퍼(MySuper)를 활용할 수 있어서다. 마이슈퍼는 각 기금 이사회가 각각의 자산배분 원칙에 따라 설계한 일종의 대표 상품. 가입자가 특별한 의사 표시를 하지 않는 한 마이슈퍼 상품을 선택한 것으로 간주한다.

3월 말 현재 마이슈퍼 상품의 전체 자산 7130억 호주달러 가운데 국내외 주식 투자 비중은 48%. 반면에 우리나라의 경우 회사가 운용하는 DB형이나 가입자 스스로 운용하는 DC형 모두 원리금 보장 상품 위주로 투자한다. 호주의 연간 퇴직연금 수익률이 9.1%(지난해 6월 말 기준)로 우리의 1.01%(지난해 말 기준)보다 훨씬 높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위험자산 투자 비중에 따라 수익률이 크게 엇갈린 셈이다.

메이 전무는 “한국도 디폴트 상품을 도입하는 경우 가입자들이 장기적으로 높은 순수익률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감독 당국의 엄격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디폴트 상품의 순수익률, 총보수가 얼마인지 등을 투명하게 공개해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DB형과 DC형 퇴직연금 ::

퇴직연금 제도는 회사가 근로자에게 지급해야 할 퇴직급여를 회사 외부의 금융회사(우리나라 같은 계약형)나 수탁법인(호주 같은 기금형)에 맡겨 운용하는 제도를 말한다. 회사가 도산해도 안정적으로 퇴직금을 받을 수 있다. 확정급여(DB)형은 회사가 책임지고 운용한 다음 정해진 퇴직급여를 보장하는 반면에 확정기여(DC)형은 회사가 매년 퇴직급여를 일정한 주기에 따라 근로자 퇴직연금 계좌에 넣어주면 근로자 스스로 또는 수탁법인에 맡겨 운용하는 유형이다.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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