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나와도 ‘그림의 떡’… 희귀암 환자 울리는 규제 풀어야

김호경 기자 , 유주은 채널A 기자

입력 2019-05-09 03:00 수정 2019-05-10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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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있어도 못 쓰는 환자들
재발률 80%인 다발성 골수종 환자, 새 항암제 나왔지만 비싸서 못 써
건강보험 적용 돕는 ‘위험분담제’… 지원 대상 확대해 수혜자 늘려야


다발성 골수종 환자들은 신약이 있어도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달 암이 재발해 2차 항암 치료를 받아야 하는 정도섭 씨(64·왼쪽 사진)와 지난해 항암 치료를 마친 한영학 씨(62)는 이런 현실이 “답답하다”고 입을 모았다. 광명=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치료를 위해 생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리산에서 산양삼을 재배하는 정도섭 씨(64)는 최근 생업을 접고 서울로 올라왔다.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2차 항암 치료를 받기 위해서다. 정 씨는 2017년 5월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판정을 받고 1차 항암 치료를 받았지만 지난달 암이 재발했다. 2차 항암 치료제 가운데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약은 ‘키프롤릭스’라는 주사제뿐이다. 앞으로 18개월간 일주일에 이틀씩 병원에 입원해 이 주사를 맞아야 한다. 치료와 생업을 병행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셈이다.



○ 신약만 기다리는 암 환자들

만약 매주 입원해 주사를 맞지 않아도 된다면 정 씨가 치료와 생업을 병행할 수도 있다. 실제 ‘닌라로’라는 먹는 항암 치료제가 있어 이를 사용하면 꼭 입원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이 먹는 항암제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약값만 매달 수천만 원에 이른다는 점이다. 정 씨는 “먹는 약을 쓰면 일을 할 수도 있는데, 보험이 되지 않으니 답답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희귀난치병인 다발성 골수종은 수술로는 치료할 수 없고 오로지 약물 치료만 가능하다. 더욱이 재발률이 70∼80%일 정도로 높아 다른 암보다 치료 기간이 길고 약값 부담이 크다. 다발성 골수종 환자들이 신약이 나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다.

택시 기사 한영학 씨(62)는 지난해 1월 다발성 골수종 판정을 받고 1차 항암 치료를 마쳤다. 지난달 다시 운전대를 잡았지만 ‘언제 재발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고 있다. 재발할 경우 자신에게 쓸 수 있는 약이 있을지도 걱정이다. 한 씨는 과거 심근경색을 앓았다. 2차 항암 치료제인 키프롤릭스는 드물지만 심혈관 부작용이 있다. 이런 부작용이 없는 신약은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사실상 약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결국 그는 2차 항암 치료를 받게 된다면 부작용을 감수하거나 치료 효과가 적은 다른 약을 써야 한다.

현재 암 환자는 전체 진료비와 약값의 5%만 내면 된다. 나머지 95%는 건강보험 재정이 부담한다. 하지만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은 비급여 치료와 의약품에는 ‘5% 룰’이 적용되지 않는다. 문제는 비급여 가운데 다발성 골수종 항암제처럼 환자에게 꼭 필요한 의약품이 적지 않다는 데 있다.


○ 신약 나와도 ‘대체제’ 있으면 무용지물

정부는 이런 사각지대를 해소하고자 2014년 ‘위험분담제’를 도입했다. 고가 신약에 건강보험을 적용하되 해당 제약사가 수익의 일부를 환급하는 방식으로 건강보험 재정 부담을 제약사와 정부가 나눠 지는 제도다.

통상 건강보험을 적용하려면 신약의 효과와 경제성 평가를 모두 통과해야 한다. 환자가 적은 희귀질환 치료제나 약값이 매우 고가인 경우 효과가 좋더라도 경제성 평가를 통과하기 쉽지 않다. 이로 인해 신약을 쓰지 못한다면 그 피해는 오롯이 환자들에게 돌아간다. 이런 폐해를 줄이고자 제약사의 환급을 조건으로 신약에 건강보험을 적용해주는 위험분담제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해외 선진국에서도 널리 시행하고 있다. 현재 18개 신약에 위험분담제가 적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 적용 범위는 환자나 의료진의 기대에 한참 못 미친다. 위험분담제를 적용하려면 △항암제나 희귀질환 치료제이면서 △대체제가 없고 △환자의 기대여명이 2년 미만인 질환 등 3가지를 모두 충족해야 한다. 의료계에서는 ‘대체제가 없어야 한다’는 규정을 ‘독소조항’으로 꼽는다. 더 좋은 신약이 나와도 기존 약이 있다면 위험분담제의 적용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현재 다발성 골수종 2차 항암제 3가지 중 한 가지에만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것도 바로 이 규정 때문이다.


○ “환자 중심으로 제도 개선해야”

의료진도 이런 현실에 답답함을 호소한다. 다발성 골수종 환자를 치료하는 김기현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더 좋은 약이 있는 걸 알면서도 가격 때문에 환자에게 사용하지 못하는 건 의사로서 굉장히 괴롭다”며 “필요한 약을 제때 쓰지 못하는 건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과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환자들이 신약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도록 위험분담제의 적용 범위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보건복지부는 환자와 의료계의 이 같은 요구를 알면서도 위험분담제 확대 반대 여론을 의식해 선뜻 제도 개선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복지부 관계자는 “2014년 도입 당시에도 위험분담제가 확대되면 약값이 불투명해진다는 반대 의견이 많아 매우 엄격하게 적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 위험분담제 ::

고가 신약에 우선 건강보험을 적용하되 제약사가 건보 적용에 따른 수익의 일부를 환급하는 제도. 환자 치료에 꼭 필요하지만 경제성이 낮거나 입증되지 않은 신약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차원에서 2014년 도입했다. △항암제나 희귀질환 치료제이고 △대체 약제가 없으며 △환자의 기대여명이 2년 미만인 경우 등 3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적용된다.

김호경 kimhk@donga.com·유주은 채널A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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