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소강석]부활의 아카시아 향기를 전하자

소강석 새에덴교회 담임목사

입력 2019-04-19 03:00 수정 2019-04-1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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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때부터 특별한 아르바이트를 했다. 옛날에 사람이 죽어 상여를 메고 갈 때, 장대에 삼베조각을 단 공포를 들고 갔다. 왜냐하면 그것을 들고 가면 100원을 줬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공포를 들고 간 아이는 삼베조각까지 줬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져다 어머니께 갖다 드리면 얼마나 입이 찢어지도록 좋아하셨는지 모른다.

“우리 막둥이가 살림꾼이네. 참 엽엽하고 싹싹해서 이렇게 돈도 벌어오고 삼베까지 가져오고 우리 막둥이가 최고네.”

다른 아이들은 명경이나 삽전을 방정맞게 들고 가는데, 나는 아주 점잖게 들고 가서 동네 어른들이 공포만큼은 나에게 독점권을 주었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입학한 뒤에는 학교를 갔다가 조퇴를 하고서 그것을 들고 갈 정도였다. 그렇게 자주 공포를 들고 가다 보니까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세뇌돼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상여 나갈 때 부르는 선소리꾼의 만가다.

그런데 그때 선소리꾼의 만가는 완전히 불가지론자들이 부르는 인생 허무가였다. “어젯밤에는 안방에서 잤건만 오늘 저녁은 북망산천, 어이노 어이노 어이가리 어이노.” 정든 집을 두고 북망산천을 향해 떠났는데 그곳이 어딘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상여가 동네를 떠나 산천초목을 향하여 들어가면 또 인생 허사가와 회의가가 나온다. “산천초목은 변함이 없건만 우리네 인생은 어디로 가는가.”

그런데 여름에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아랫목에다 두고 음식을 하느라 불을 때대니 구들장이 뜨뜻해서 송장이 썩는다. 그러니 상여를 메고 갈 때 썩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땅에 묻을 때도 송장 썩은 물이 줄줄 흘러서 냄새가 얼마나 고약한지 모른다. 그날 저녁에 잠을 자려고 하면 죽은 사람의 눈동자가 천장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나를 뚫어지게 보는 것 같아서 잠이 안 왔다.

“아, 인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저 찬란히 반짝이는 별들 너머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사람이 죽으면 황천길을 떠나서 북망산천으로 간다는 말인가?” 그때 누가 내게 복음을 전해줬다면 죄와 죽음의 문제에 대한 답을 알았을 텐데 말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다. 어느 종교도 선을 가르치지 악을 가르치진 않는다. 그러나 참 종교는 반드시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줘야 한다. 그것은 인류의 죄 문제와 죽음의 문제다. 그런데 이 세상 그 어떤 종교의 교주도 다 죽었다. 그들의 사리나, 유품, 무덤을 자랑할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망의 법칙을 깨뜨리며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이렇게 선언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리라.”(요11:25) 이처럼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과 영생의 길이요 영원한 인류의 소망이시다.

겨울이 물러간 자리, 황막했던 들판은 봄기운으로 가득하다. 마치 부활절의 의미가 봄과 관련이 있듯이, 부활의 복음은 우리의 삶과 교회와 사회에 스프링처럼 솟아나는 생명력을 가져온다. 우리 민족의 광야에도 부활의 아침이 밝아오기를 소망한다.

이제, 열두 제자처럼 부활의 증인으로서 이웃에게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자. 생명의 문화가 소멸되고 죽음의 문화가 기승하고 있는 이 시대를 향하여 부활의 소식을 외치자. 봄꽃의 향기가 터져 나오듯 부활의 팡파르를 울리자. 부활의 은총이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아카시아 향으로 진동하게 하자. 그럴 때 예수님의 부활은 나 혼자만의 부활이 아닌 우리 민족을 살리는 부활의 은총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소강석 새에덴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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