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찍혀보니 찍히는 사람이 대단하단 걸 이해하게 되네요”

신규진 기자

입력 2019-04-17 03:00 수정 2019-04-17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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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에이전시 ‘테오’ 대표 안성진-이전호 작가

1999년 데뷔한 이전호 작가(왼쪽)는 8년 선배인 안성진 작가의 덕을 많이 봤다고 한다. 이 작가는 “당시 음악 앨범 사진을 독과점(?)하다시피 했던 안 작가가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동료들에게 장비를 무상으로 빌려줬다”고 말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피사체를 담는 일만 20년이 넘었지만, 모델로선 어색하기 그지없다. “웃어보라”는 말에 수줍은 미소가 흘러나오고 갈 곳 잃은 손끝은 허공을 맴돈다. 서로를 마주 보고 나서야 호탕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서울 강남구 에이전시 ‘테오’에서 10일 만난 사진작가 안성진(52), 이전호 씨(51)는 “찍혀 보면 찍히는 사람이 대단하다는 걸 이해하게 된다”며 웃었다.

‘올드보이’ ‘도둑들’ ‘국제시장’ ‘부산행’ ‘독전’ 등 이들을 빼놓고 한국영화 포스터를 논하기 힘들다. 시놉시스만 보고 한 컷을 고민하는 경우도 많다. 이 작가는 ‘올드보이’ 촬영 당시 박찬욱 감독이 영화의 핵심 이미지로 제시한 ‘보랏빛’을 가지고 사흘 동안 머리를 싸맸다. 안 작가는 지난달 개봉한 ‘돈’ 포스터 촬영 때, 극 중 어리바리한 신입사원에서 베테랑 주식 브로커로 변해가는 류준열에게 “100만 원 벌었다” “스포츠카를 계약한다” 등을 외치며 표정 변화를 담아냈다.

2003년 이들이 설립한 ‘테오’는 사진작가들의 계약 등 사업을 대행하는 업체다. 사진작가들의 소속사인 셈. 젊은 작가를 양성하고 이들의 권익을 보호하자는 취지로 둘이 뜻을 모았다.

“요새는 작가가 없어요. 점점 에디터, 광고주 뜻대로 사진만 찍는 직업이 돼가고 있죠.”

한국영화 포스터에서 안성진 이전호 작가의 손길을거치지 않은 작품은 드물다. 안성진 작가의 ‘돈’(왼쪽 사진), 이전호 작가의 ‘올드보이’. 테오 제공
사진작가의 세계를 묻자마자 이 작가 입에서 쓴소리가 먼저 나왔다. ‘기획력의 부재’가 가장 큰 문제라고 했다. 안 작가는 “카피, 기존 작품을 참조한다는 명목으로 창작의 영역이 줄고 있다. 그저 안정적인 수준의 사진을 재생산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유명 패션잡지 화보 촬영을 해도 외국 잡지를 찢어오는 에디터들이 허다하다. 잡지 사진 가격도 페이지당 15만 원으로, 10년 전 그대로다.

“예전에는 촬영을 하기 전 에디터, 제작사와 촬영 키워드, 주제를 떠올리며 함께 기획하고 발전시켜 나갔어요. 조명 설계만 수십 차례 변경할 정도였죠. 지금은 말 잘 듣는 사진작가가 최고인 것 같아요.”(안성진)

필름에서 디지털로 카메라 기술이 변화한 이유도 크다. 안 작가는 “셔터 한 번의 중요성이 희석됐다. 기관총 쏘듯이 수천 장을 찍을 수 있는 디지털 카메라 특성상 ‘찍고 나중에 고치자’는 인식도 확산됐다”고 했다.

그래도 시류의 변화에 무작정 불평만 할 순 없는 일. ‘테오’와 여러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모여 진행한 ‘신인에게 경배를(SALUTE FOR ROOKIES)’ 프로젝트는 새로운 도전의 일환이다. 자신을 알릴 기회가 적은 신인 배우들의 사진, 영상 등을 제작하기 위해 이 작가와 이유진 CJ ENM PD가 기획했다. 소속사가 없는 배우들로도 대상을 확장해 나갈 예정이다.

“너에겐 추억, 나에겐 데이터”라는 안 작가의 말처럼, 일상은 영감의 원천이다. 무심코 들른 식당, 공원도 좋은 촬영 장소가 된다. 안 작가가 종로구 익선동의 한식당 옆 골목을 걷다가 느낌이 좋아 가수 윤종신을 앉혀 놓고 찍은 사진이 1996년 그의 5집 앨범 ‘우(愚)’의 표지가 됐다. 이를 눈여겨본 이 작가는 영화 ‘가족’(2004년) 포스터를 이 골목에서 찍었다.

두 작가 뒤로 천장까지 솟은 큰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2000여 개 프로젝트의 ‘보물’ 사진들이다.

“필름 카메라의 쇠퇴를 보여주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사진작가들에게 가장 슬픈 영화예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변화에 맞춰 우리도 바뀌어가야죠.”(안성진)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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