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22곳 “수시채용 긍정적”… 채용방식 大변화 예고

김지현 기자 , 허동준 기자

입력 2019-04-13 03:00 수정 2019-04-1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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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정기공채서 수시모집으로?… 30대 그룹 설문조사

국내 A그룹에서 신성장동력 사업을 맡고 있는 한 계열사는 부원 전원이 경력직으로만 꾸려진 부서들이 수두룩하다. 후발주자로 시장에 뛰어든 상황에서 매년 3월과 9월로 정해져 있는 공채 시즌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우리 회사뿐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 사업을 맡고 있는 계열사들은 대부분 비슷할 것”이라며 “국내외 경쟁사에서 근무했던 경력직들을 확보하고 채용하는 데 혈안이 돼 있다”고 했다.

국내 B그룹은 최근 부서별로 채용공고를 내게 한 뒤 각 부서원들에게 함께 일하고 싶은 인재상을 직접 적어내도록 했다. 과거 일괄적인 그룹 차원의 인재상을 기대하던 것과 달리, 실제 함께 일해야 하는 팀원들의 의견을 더 중시하겠다는 취지였다. 경력직 비중이 급속도로 늘면서 기존 공채 출신과의 괴리감을 줄이기 위한 회사 차원의 조치들도 나오고 있다. 삼성의 경우 공채 위주의 ‘기수 문화’가 연공서열 분위기를 조장할 수 있다며 30년간 이어 오던 그룹 차원의 신입사원 대상 하계수련회를 2016년 폐지했다.


○ 이미 시작된 채용시장의 변화


동아일보가 국내 30대 그룹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국내 대졸 신입사원 채용 시장의 변화는 이미 시작된 것으로 나타났다. 일원화된 공채 대신에 상시채용 등 채용 방식을 다양화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4개 그룹만 ‘부정적’이라고 했고 ‘중립’이라고 응답한 3곳을 제외한 22개 그룹이 ‘긍정적’이라고 했다. 특히 한 그룹은 “작년부터 일부 계열사는 이미 신입사원 대상으로도 상시채용을 진행 중”이라며 “올해까지는 공채와 병행해 진행하겠지만 상시채용 확대를 검토하는 계열사들이 더 늘고 있다”고 했다. 현대자동차에 이어 공채 폐지를 선언하는 기업들이 더 나올 수 있다는 의미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현대차처럼 대놓고 발표만 못 할 뿐 대부분의 회사들이 이미 공채 비중은 낮추고 상시채용 비중을 늘리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주요 기업들이 정기 공채 축소를 희망하는 가장 큰 이유로는 ‘필요한 인력을 빠른 시간 내에 수급할 수 있어서’(24곳 응답·복수 응답)라는 답이 가장 많이 나왔다. 매년 상·하반기로 정해져 있는 공채 시점까지 기다리기엔 산업 환경이 급박하게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요즘 가장 유망한 인공지능(AI) 산업만 해도 인재 풀이 워낙 작다 보니 먼저 데려가는 회사가 임자”라며 “정기 공채 시스템으로는 수시로 팀을 만들었다가 없애고, 수시로 사람을 뽑는 구글이나 애플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가 없다”고 했다.

이어 ‘직무 적합형 인재를 맞춤형으로 채용할 수 있어서’라는 응답이 14곳으로 뒤를 이었고 ‘산업 구조 변화에 유연한 인력 대처가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응답한 그룹도 10곳이었다. 6개 그룹은 대규모로 한날에 공채 시험을 치르기 위해 고사장 확보 및 시험지 제작 등에 썼던 행정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기도 했다. 실제 삼성그룹의 경우 전국적으로 인·적성시험을 한 번 치르는 데 10억 원 이상을 쓰는 것으로 알려졌다.


○ “공채 폐지해도 실제 채용인원 줄지 않아”

공채를 폐지하거나 축소할 경우 기업의 채용규모가 줄어들 것이란 사회적 우려와 달리 ‘채용인원이 줄어들 것’이라고 응답한 기업은 29곳 중 10곳이었다. 나머지 18곳은 변화가 없다고 했고, ‘늘어난다’고 예상한 기업도 한 곳 있었다.

예상 밖 결과에 대해 한 대기업 인사팀 관계자는 “기업들이 매년 뽑겠다고 말하는 수는 공개하면서도 이 가운데 실제 뽑은 수는 최종적으로 공개를 안 하지 않느냐”며 “어차피 기업은 철저하게 필요한 만큼만 뽑기 때문에 대규모 ‘보여주기식’ 공채를 하든, 상시채용을 하든 전체 인력 채용 규모에는 큰 변화가 없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반면 또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공채를 폐지한다고 해도 사회적 여론이나 취업준비생들의 우려를 고려해 당장 드라마틱하게 채용 인원을 줄이진 못할 것”이라면서도 “다만 정기 공채가 사라져 기업들이 사회적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현실적으로 조금씩 채용 인원을 줄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 대부분의 기업들은 대규모 공채를 축소하거나 폐지할 경우 구직자에게 미칠 수 있는 부정적 영향으로 ‘경력 중심의 채용으로 신입 채용 기회 감소’(21개 그룹·복수 응답)를 꼽았다. 한 취업 포털 관계자는 “직무 중심의 상시채용이 늘면 기존 채용 시장의 틀 자체가 바뀔 것”이라며 “막 대학을 졸업한 취업준비생보다는 1, 2년 이상 해당 직무에서 경험(인턴 포함)을 가진 경력자들에게 유리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 밖에 기업별로 채용 기준이 상이하기 때문에 취업준비생들의 부담이 더 커질 수 있고 채용 관련 정보를 확보하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을 써야 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공채 축소로 인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기업들이 스스로 가장 노력해야 할 부분으로는 ‘채용 기준 및 인재상 등 명확한 정보 제공’(17곳)과 더불어 ‘채용 과정의 공정성 강화’(15곳)가 가장 많이 꼽혔다. 올해 하반기 대기업 공채 시험을 준비 중인 국내 한 사립대 4학년 박모 씨(25·여)는 “한국에선 이른바 ‘빽’ 없이는 취업도 어렵다는 불안감이 있는 가운데 그나마 한날한시에 동일한 인·적성시험을 치러 점수를 매긴다는 게 취업준비생들에겐 큰 위안이었다”며 “공채 대신 수시채용이 늘어난다면 아무래도 정보나 인맥이 많은 사람들에게 유리할 것 같아 걱정된다”고 했다.

한편 급변하는 채용 시장의 상황에 따라 정부가 가장 중점을 둬야 할 정책에 대해서는 대부분 기업들이 “경직된 노동환경을 개선해야 하고 기업의 채용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공통된 답변을 내놨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1년에 수천 명씩 신입사원을 뽑는 대규모 공채는 과거 고도 성장기에나 가능했던 일”이라며 “특히 한국처럼 한 번 뽑으면 정년까지 고용을 보장해야 하는 환경에선 유지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취업포털 사람인 임민욱 팀장은 “정부 차원에서 일자리 확대를 강조하고 있다 보니 기업들이 대놓고 채용 제도를 쉽게 바꾸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며 “대기업이라고 늘 경기가 좋은 게 아니기 때문에 인력 수요에 맞는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고 했다.

김지현 jhk85@donga.com·허동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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