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터줏대감 ‘만물사’(1973~2019) 지다

구자홍 기자

입력 2019-03-30 09:46 수정 2019-03-30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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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것 빼곤 모두 살 수 있던 곳…현대사 현장 지켜보다 재건축으로 폐업

1981년 10월 서울 종로구 서린동 127번지에 들어선 ‘만물사’가 건물 재건축으로 38년 5개월 만인 2019년 3월 31일 문을 닫는다. [김도균]
서울 청계천을 마주한 무교동 사거리 ‘만물사’가 건물 재건축으로 3월 31일 문을 닫는다. 1973년 가게 문을 연 지 46년 만, 1981년 청계천 옆의 현 위치로 이전한 후 38년 5개월 만이다. 46년 동안 만물사를 꾸려온 최영길(71) 씨는 “시원섭섭하다”고 했다.

“장사해 애들 키워 시집, 장가보내고 지금까지 먹고살았으니 미련은 없어요. 그래도 막상 가게를 접으려니 참 아쉽기는 하네요.”

전남 장성군 북상면에서 태어난 최씨는 초교를 졸업한 뒤 먹고살기 위해 열다섯 살이던 1963년 무작정 상경했다. 최씨가 자란 시골 마을은 장성댐이 만들어지면서 수몰됐다. “이제는 고향에 갈 수 없다”는 그의 담담한 말투에 짙은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가 서울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신문팔이. ‘동아일보’가 석간으로 발행되던 시절이다. 최씨는 낮에는 보급소에서 신문을 받아다 서울 시내 다방 등을 돌며 팔았고, 저녁에는 광화문 뒤편에 있던 협성중 야간과정을 다녔다.

“처음 올라왔을 때 서울 시내도 초가집 일색이었어요. 빌딩이라고 해봐야 3층 정도가 가장 높았을까….”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빌딩 숲으로 변한 무교동 사거리의 옛 모습에 얽힌 그의 이야기보따리가 풀렸다.

“저기(예금보험공사 건물)가 ‘월드컵’ 자리예요. 코미디언 배삼룡이 나오고, 가수 태진아가 노래 부르던…. 그 옆 씨티은행 자리에는 엠파이어홀이 있었고요. 삼원일식도 원래 엠파이어홀 건물에 같이 있었는데, 지금은 옆 건물(효령빌딩) 지하에 있죠. 서린동 SK빌딩이 들어선 자리는 이장희, 윤형주가 노래하던 세시봉이 있던 데고, 연예인 집합소였던 ‘연다방’, 정치인 집합소였던 ‘태화관’이 있던 곳은 지금 저기(한국무역보험공사 건물)로 바뀌었죠. 태화관에 유진오, 박순천, 김영삼, 김대중 씨가 참 자주 왔어요.”

국회는 서울 여의도로 옮겨가기 전까지 현 서울시의회 건물에 있었다. 이 때문에 야당 인사의 사무실이 주로 무교동에 자리 잡았다.

“박정희 정권 때 시그너스빌딩엔가에 김영삼 씨 사무실이 있었어요. 야당 탄압이 심할 때라 닭장차가 자주 서 있고, 이따금 야당 인사들이 강제로 연행되는 모습도 여러 번 봤어요.”

최씨는 군 복무 기간을 제외하고 1963년부터 2019년까지 서울 시내와 무교동 사거리의 변화를 직접 목격해온 산증인이다.

“여기 처음 가게를 냈을 때만 해도 남산이 훤하게 한눈에 보였어요.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 등화관제 훈련을 할 때면 남산에서 내려다보고 ‘무교동 유흥가 불 끄라’고 확성기로 고래고래 소리치곤 했을 정도니까요.”


200배 이상 값 오른 북엇국
20여 년 전 가게에서 포즈를 취한 최영길 만물사 대표. 최씨의 젊은 모습만 다를 뿐 가게 내부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진 제공 · 최영길]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기 전인 1980년대 이전까지 서울의 대표적 유흥가는 무교동이었다. 1971년 7월 1일자 ‘동아일보’는 ‘비어홀 스트립쇼 엄단’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서울시 보건당국은 단속에 앞서 시내 중구 무교동 등지의 ‘월드컵’ ‘엠파이어’ ‘올림피어’ 등 비어홀이 스트립쇼 공연을 하고 있다는 시민들의 고발을 받아들여 이들 업소에 대해 스트립쇼 공연을 즉각 중지하도록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가두시위가 빈번했던 1980년대 묵묵히 무교동 사거리를 지킨 최씨는 1987년 6월 이한열 열사 장례식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시위대가 거리를 가득 메웠고 그때 경찰이 최루탄을 엄청 쏴댔어요. 가게 문도 못 닫고 집으로 갔는데 다음 날 와보니 없어진 물건 하나 없이 가게가 그대로 있더라고요.”

무교동과 서린동은 낙지 요릿집으로도 유명하다. 최씨는 “낙지 음식점의 원조는 유정낙지”라고 회고했다.

“무교동에서 낙지 원조집으로 여겨지던 유정낙지는 25년 전쯤 사장 부부가 모두 돌아가시면서 명맥이 끊겼어요. 지금은 할아버지부터 아버지, 지금은 손자에 이르기까지 3대가 낙지집을 운영하는 서린낙지가 사실상 낙지집의 원조가 됐죠.”

서린낙지는 서린동 재개발 여파로 종로를 가로질러 르메이에르빌딩 2층에 자리 잡고 있다. 최씨가 만물사를 40년 넘게 운영하는 동안 무교동 사거리는 외형만 변한 것이 아니다. 물가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처음 가게를 냈을 때 생선에 고기반찬까지 주는 백반정식 가격이 100원가량 했어요. 그런데 요즘 그 정도 백반정식을 먹으려면 9000원, 1만 원 정도 줘야 해요. 또 터줏골 북엇국은 처음 먹었을 때 35원 받았는데, 지금은 7500원 해요. 북엇국 한 그릇 값이 200배 넘게 오른 셈이죠.”

음식 물가에 비해 가게 임대료는 상대적으로 덜 오른 편이다. 최씨가 지금 자리에 약 5㎡(1.5평) 규모의 만물사를 열었을 때 한 달 임차료는 23만 원. 그러다 한국 경제가 호황기를 구가하던 1990년대 초·중반 월 74만 원까지 뛰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하락해 최근까지 월 70만 원 수준의 임차료를 부담했다.


만물사의 만능인
만물사에 진열돼 있는 다양한 물건들. 펜과 플래시, 자물쇠, 팔찌 등 다양한 종류의 물건과 각양각색의 시계가 진열돼 있다. 아날로그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휴대용 라디오와 복사를 기다리는 열쇠들(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도균]

만물사는 한자리에서 38년 넘게 계속 장사를 해왔지만 최씨는 현저동과 누하동을 거쳐 1978년부터 불광동에 정착해 서울살이를 하고 있다. 슬하에 2남 1녀를 둔 최씨 부부는 거처를 옮길 때마다 자녀를 하나씩 얻었는데, 지금은 저마다 한국 사회에서 착실히 자신의 삶을 일궈가고 있다.

“큰아들은 회계사로 일하고 있어요, 작은아들은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같은 계통 회사에 다니고 있죠. 딸은 시집가 1남 1녀를 키우고 있어요.”

큰아들과 작은아들은 각각 아들 1명을 둬 최씨는 손주가 모두 4명이라고.

최씨와 인터뷰하는 사이 최씨의 아내 김순복 씨가 가게에 들어섰다. 청계천 주변 한 상가에서 전등을 갈아달라는 요청을 받은 최씨가 잠시 가게를 비워야 해 집에 있던 아내를 부른 것. 없는 물건이 없다고 해 가게 이름을 ‘만물사’로 지었는데, 최씨는 무교동 사거리에서 못하는 게 없는 ‘만능인’으로 통한다. 시계 수리와 열쇠 복사는 기본이고, 주변 상가의 전등 교체 등 자잘한 일처리도 그의 몫이었다. 건물 관리인이 전등을 끼울 수도 있지만 최씨에게 얘기하면 직접 전등을 구해 갈아 끼워주기 때문에 주변의 건물 관리인들이 최씨를 찾는다고. 전등 교체를 위해 최씨가 자리를 비운 사이 김씨와 잠시 대화를 나눴다. 전남 담양이 고향인 김씨는 “어떻게 만나 결혼하게 됐느냐”는 물음에 “오빠 친구”라고 답했다. 아이 셋을 키우며 틈틈이 가게에 나와 남편과 함께 만물사를 꾸려온 김씨는 “팔기도 많이 팔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이 많은 물건을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걱정스러워했다.

옆 건물 관리인이 “떨이로 무게를 달아 kg당 얼마씩 싸게 넘기면 되지 않느냐”고 하자, 김씨는 “그렇게는 못 하죠”라며 애착을 보였다.

단골이 찾아오면 김씨는 “이달 말로 가게 문을 닫게 됐으니 필요한 것 있으면 챙겨가라”며 이것저것 물건을 보여줬다. 아내 김씨도 남편 최씨 못지않게 야무지게 장사를 해왔음을 짐작게 했다.

만 가지 물건을 판다고 이름 붙여진 만물사지만, 시대마다 고객이 즐겨 찾는 아이템은 따로 있었다. 처음 가게 문을 연 1970년대 초·중반에는 만년필, 1970년대 후반 들어서는 지포, 던힐, 듀퐁 같은 고급 라이터가 잘 팔렸다. 최씨는 “30만 원짜리 듀퐁 라이터가 내가 팔아본 물건 가운데 가장 고가 제품이었다”고 회고했다.


시대별 ‘핫 아이템’
최영길 씨와 최씨의 부인 김순복 씨. 폐점을 사흘 앞둔 3월27일 만물사에서 포즈를 취했다. [김도균]

1980년대 들어서는 일회용카메라가 많이 나갔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는 고급 도장과 시계, 면도기, 계산기 등이 잘 팔렸고,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디지털카메라를 찾는 수요가 크게 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해외에 다녀온 사람들이 외국에서 사온 물건을 내게 팔거나, 우리 가게에 있는 물건과 바꿔갔어요. 그래서 우리 가게에는 없는 것이 없었죠.”

외국산 물건이 대거 유입되면서 최씨의 만물사는 한동안 호황을 누렸다. 최씨는 “40년 된 단골도 있고, 제주와 부산에서도 우리 가게를 찾는 단골손님이 있었다”며 “그분들 덕에 먹고살았다”고 말했다.

최영길 만물사 대표가 지포 라이터에 기름을 넣고 있다. [김도균]
전국적으로 단골이 많았던 데는 무엇이든 말만 하면 구해다 주는 그의 남다른 재주가 한몫했다. 서린동 한 빌딩에서 근무하는 20년 단골손님 A씨는 “내가 아무리 찾아다녀도 구하지 못한 물건을 최씨는 어디선가 금방 구해왔다”며 “참 신묘한 재주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최씨는 “만물사 물건 대부분이 철물인데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 청계천과 답십리 중고상 등을 돌며 물건을 구해와 팔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만물사는 스마트폰 보급으로 온라인 쇼핑이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차츰 쇠락의 길을 걸었다.

“외환위기 이후에도 가게는 제법 잘됐어요. 그러다 휴대전화가 나오고 스마트폰이 나온 10년 전부터는 영 안 되기 시작했죠. 구매 패턴이 온라인으로 완전히 바뀐 탓이에요. 나이 든 분은 가게에서 물건을 만져보고 사 가는데, 요즘 젊은 사람은 스마트폰으로 구매해 배달시키잖아요.”

최근 10년간 최씨는 매출 하락을 시계 배터리 교환과 열쇠 복사 등으로 버텨왔다.

“물건이 잘 안 나가길래 열쇠를 배웠어요. 열쇠나 도장, 시계 수리같이 손으로 만져서 하는 것만 꾸준히 됐거든요.”

기자가 경험한 만물사는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오기 힘든 충동 구매 유혹의 온상이었다. 시계 배터리 교환하러 갔다 전화기와 맥가이버 칼, 벨트 등을 샀다. 볼일만 보고 가게를 빠져나오려면 굉장한 인내가 필요했다. 길쭉한 약 5㎡의 가게는 ‘안 사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개미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싸게 드릴 테니 이것도 한번 보세요”라고 슬쩍 거드는 최씨의 한마디는 충동구매를 대량구매로 이어지게 만드는 주술이었다. 적은 돈으로 여러 물건을 살 수 있어 ‘소확행’을 안겨주던 만물사가 많이 그리울 것 같다.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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