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종국 기자의 슬기로운 아빠생활]<12> 아빠들에게 ‘은밀한 악마’가 찾아온다

변종국기자

입력 2019-03-11 14:00 수정 2019-03-11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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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클립아트코리아

육아를 하면서 스스로 “참 너도 나쁜 아빠다” “너란 사람이 그렇게 좋은 아빠만은 아니야…” 싶을 때가 종종 있다. 힘든 육아를 조금이나마 벗어나보려 각종 잔머리와 잔꾀, 속임수 등 이른바 ‘꼼수’를 종종 쓰기 때문이다. 내 안에 악마가 살고 있구나싶은 생각마저 든다. 직장 생활로 체력 및 정신적 피로도가 과다 축적됐을 때 아빠들에게 은밀한 ‘악마’가 찾아온다. 그렇게 찾아온 악마는 아빠들의 뇌를 곧 장악한다. 아빠들은 너무나도 손쉽게 ‘악마’에게 정신과 육체를 내준다. 아빠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싶으면서도 ‘그렇게 하고 있는’ 묘한 상황에 빠지고 마는데…

#사례1

늦은 밤 집으로 귀가하는 길. 내 새끼가 보고 싶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뛰어 나오는 아이. 한나절 쌓인 스트레스가 녹아내린다. 아이가 보고 싶은 건 확실하다. 하지만, 아이가 자고 있다면 더 좋을 것만 같은 이 기분은 뭐지? 아내에게 카톡을 날려본다. “애들 자?”
아이가 보고 싶지만, 아이가 자고 있으면 더 좋을 것만 같은 이 기분. “잠들려고 해” 라는 아내의 답장.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더 빨라지지 않고 왜 점점 느려지는 걸까? 애가 혹시나 잠들려다 깨면 안 되기 때문이지. 분명 다시 말하지만 아이가 보고 싶다. 오늘 못 보면 아쉬울 것 같지만, 아빠들에겐 ‘내일’이 있다.


#사례2

힘들게 아이를 재운 아내. 집 현관문을 열자 ‘쉿!’ 이라는 제스처를 취한다. 애를 깨우면 안 되니까. 하지만 아이가 보고 싶다. 방문을 슬그머니 연다. 아이가 곤히 자고 있다. 너무 예쁘다. 좀 전 까지 아이가 잠들었으면 했던 악마가 갑자기 천사로 돌변한다. “그래 뽀뽀라도 해주자, 이불이라도 덮어주자” 마음먹는다. 다가간다. 우리 아기 잘 자라 뽀뽀~. 아기가 깨버렸다. 망했다.


#사례3

아이가 감기에 걸려 병원에 갔다. 아프면 보통 잠에 일찍 드는데 아닌 경우도 있나보다. 의사 선생님도 “잘 먹고 푹 자야 빨리 나아요”라고 말한다. 나는 “그런데, 선생님 우리 애는 잠을 그렇게 안자요”라고 물었다. 의사가 말했다. “그럼 잠을 좀 잘 자도록 수면기능이 있는 약 성분을 넣어 드릴까요?”
그새 악마가 찾아왔다. “애가 일찍 잠든다고오오오오? 오호홍홍 으흐흐? 의학적으론 문제가 없겠지 당연히!” 이내 천사도 찾아왔다. “수면 기능이라면 수면제? 워워 그럴 순 없지. 어떻게 애한테 수면제를 먹여?” 천사가 이겼다. “아니에요. 선생님 (수면기능은) 괜찮을 것 같아요. 허허” 그렇게 진찰을 받고 약을 사들도 온 그 날 밤. 아이는 역시나 잠에 들려 하지 않는다. 아픈 애가 맞나 싶을 정도다. 의사 선생님의 ‘수면제’ 이야기가 떠오른다. 아이에게 “의사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지”라며 교육을 하던 내가, 막상 의사 말을 듣지 않아서 이 고생을 하는 구나 싶다.

사진 출처 클립아트코리아
#사례4
아이가 책을 읽어 달라고 한다. 한두 권만 가져오면 좋으련만. 노벨상을 타실 작정이신지 책을 5, 6권 가져온다. 누워서 책을 읽어주면 팔이 아프고, 엎드려서 읽어주면 허리가 아프다. 앉아서 읽으면 아이가 잠을 안 잔다. 아무튼 가져온 책을 다 읽어 줘야 잘 기세다. 하지만 아이(만 3세)는 글자를 모른다. 두 세 페이지를 몰래 넘긴다. 한 두 문장을 건너뛰어 읽는다. 하지만 아이도 바보가 아니다. 한 두 번은 통하는데, 뭔가 내용이 달라졌다 싶으면 곧 바로 알아챈다. 몰래 두 페이지를 넘겨서 읽어주니 다시 원래대로 읽으라며 책장을 앞으로 넘기더라. 식겁했다. 아예 1, 2권의 책을 베게 밑에 숨겨봤다. 한 두 번은 통한다. 하지만 걸린다. 걸리기만 하면 다행이지, 엉엉 울기도 한다. 조심하자. “여보, 우리 아이는 책과 친해지게 하자, 책을 많이 보게 하자”고 다짐했던 내가 아니던가? 그런데 왜 이러고 있는 걸까? 이게 다 악마 때문이다.


#사례5
어차피 집에는 가야 한다. 워라밸 때문에 회식은 1차만 하고 끝난 다는 걸 와이프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 어차피 육아 전장으로 투입될 운명이라면. 최후의 만찬이라도 즐기자. A씨는 카페로 발걸음을 옮긴다. 당을 충전하기 위해 달콤한 음료를 시킨다. 게임도 하고 음악도 듣고, 책도 본다. 나만의 달콤한 휴식. 한 시간이 흘렀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하지 않았던가? 동네라도 한 바퀴 돌다 가는 아빠. 지하철을 타도되는 걸 버스로 돌아 돌아오는 아빠. 편의점 앞 테이블에서 야구 잠시 보고 들어가는 아빠. OLLEH! 꼼수가 아니다. 육아를 더 열심히 하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다.

그 밖에도. 다양한 취재원(물론 나도 포함)들로부터 고해성사를 들었다.

“회식자리에서 2차 정말 가기 싫은데,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더라.”
“솔직히 일부러 집에 늦게 들어갈 때 있지. 하느님도 애 낳으면 집에 늦게 갈려고 할 때 있을 껄?”
“주말이나 연휴에 근무할 사람 손들라고 할 때, 자진해서 손들까 고민 했다.” (이행 여부는 밝히지 않음)
“사탕 초콜릿 주면 안 되는 거 알지만, 애들 달래려 사탕 초콜릿 자주 찔러 줬다. 그것도 엄마 몰래.”
“애들이 외출해서 떼쓰고 울고불고 할 때, 진정시키려고 유튜브 틀어준다. 영상 너무 보면 안 좋은데 싶지만. 어쩌겠어. 직빵인데.”

등등. 하지만. 다시. 한번. 계속. 거듭. 말하지만. 아빠들은 내 아이를 너무 사랑한답니다.

변종국 기자 bj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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