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하정민]경영의 神이 된 관종소녀

하정민 국제부 차장

입력 2019-03-11 03:00 수정 2019-03-1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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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카일리 제너 인스타그램
하정민 국제부 차장
자신이 이끄는 기업만큼 유명한 스타 경영자들이 있다.

세 부류로 나누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이나모리 가즈오 일본 교세라그룹 명예회장, 고(故) 마쓰시타 고노스케 파나소닉 창업자처럼 극기, 투혼, 불요불굴의 정신을 강조하는 구도자(求道者)형 경영자가 있다. 고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주나 데라오 겐 발뮤다 창업주처럼 디자인, 영감, 직관 등을 중시하는 천재형도 있다. 리처드 브랜슨 영국 버진애틀랜틱그룹 창업자와 고 허브 켈러허 사우스웨스트항공 창업주는 재미(fun)와 직원 중시 경영을 우선해 거장 반열에 올랐다.

세계 경영학계의 찬사를 받아 온 이들의 성공 비결과 시사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5일 미 포브스가 세계 최연소 자수성가 억만장자로 꼽은 카일리 제너(22)의 성공 비결을 보며 스타 경영자 역사책도 이젠 새로운 세대가 수놓을 시기가 왔다는 생각이 든다. 경영학 수업 한 번 제대로 들은 적 없지만 자신의 고객인 밀레니얼 세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꿰뚫고 있고, e커머스와 소셜미디어가 바꿔놓은 유통 플랫폼의 급격한 변화를 사업 현장에 가장 잘 적용하고 있다.

제너는 ‘유명한 걸로 유명한’ 카다시안 자매의 이부동생이다. 2015년 18세 어린 나이에 화장품 회사 카일리 코스메틱스를 차려 3년 반 만에 1조2000억 원의 재산을 모았다. 사업 초기 가족의 유명세와 재정적 지원을 고려해 보면 그의 출발선이 남보다 앞서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스물둘 워킹 맘이 조(兆) 단위 재산을 모을 만큼 세상이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이 회사는 오프라인 매장이 없다. 회사 웹사이트와 인스타그램이 유일한 판매 통로. 생산·판매·배송도 직접 하지 않고 대행업체를 쓴다. 직원도 불과 열둘인데 다섯은 파트타임이다. 광고도 제너 본인(1억3000만 명)과 회사(2000만 명) 인스타그램 계정으로 대신한다.

제품 교환, 환불, 반품도 해주지 않는다. 립스틱과 립라이너가 같이 있는 대표 상품 ‘립키트’ 가격은 약 3만 원. 이 돈 받고 땅덩이 넓은 미국에서 일일이 교환하고 환불해주면 배송비로만 회사 거덜 날 판이라는 점에 착안한 영리한 시도다. 고객들은 오히려 이를 반긴다. “힙(hip)해서 좋다” “고객들에게 불친절하니 오히려 더 멋져 보인다”….

무엇보다 제너는 ‘재입고(restock)’를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한 거의 최초의 경영자다. 그는 자사 제품이 품절될 때마다 동종 상품이 다시 들어오기 전 반드시 인스타그램에 이 소식을 올린다. “그거 알아? 내일 오후 3시 새 립키트가 들어온대. 어떤 색깔이냐고? 내일 직접 확인해.” 사실 재입고까지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며칠. 그래도 고객들은 이 소녀 감성이 물씬 나는 인스타그램 게시물에 열광한다. ‘밀당 기술’은 연애에만 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물두 살 경영자로부터 배운다.

회사가 급성장하면서 생산부터 유통까지 전 과정을 직접 하라는 권유도 많지만 이를 덜컥 받아들이지 않는 신중한 면모도 있다. 제너는 언론 인터뷰에서 “내가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설 때 오프라인에 진출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어렸을 때 유달리 얇은 입술을 콤플렉스로 지녔던 소녀는 자매들 중 가장 큰 부자가 됐다. 미 뷰티전문매체 WWD는 지난해 3억6000만 달러였던 이 회사 매출이 2022년 10억 달러가 될 것으로 점쳤다. 로레알은 80년, 바비 브라운은 25년이 걸린 일이다. 이제 그를 피플, US위클리 등 연예매체가 아니라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 등 고급 경영전문지의 표지 모델로 만나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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