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낯 드러난 을의 갑질…현대차 하청업체 공갈죄 ‘철퇴’

뉴스1

입력 2019-03-10 07:20 수정 2019-03-10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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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은 공갈죄, ‘을=선, 갑=악’ 프레임에 외부선 논란
법 구제는 국민 권리 “대기업 갑질도우미‘는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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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운동. 우월적 지위에 희생당한 성범죄 피해자들은 일어섰고 가해자들은 공분을 샀다. 총수 일가, 고가 아파트 입주민, 백화점 VIP 고객 등의 갑질 역시 도마 위에 올랐다. 을의 지위에서 당한 억울한 일에 보통사람들은 공감했다. 지위를 악용한 갑질은 병폐이자 범죄다. 첫발을 내디딘 변화의 움직임은 응원 받아야만 한다.

그런데 변화에는 항상 그림자가 따른다. 이번엔 ’을=선(善), 갑=악(惡)‘이라는 프레임이다. 우월적 지위가 나쁜 게 아니라 이를 악용한 행동이 악이다. 갑의 위치에서 이런 행동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

세상은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고 흑백도 아니다. 을의 지위를 이용한 범죄는 분명 존재한다. 잘잘못은 사회적 약자 여부가 아니라 사실관계를 따져 판단해야 한다. ”을의 자리에서 어려움을 겪었으니 범죄 혹은 그에 준하는 행동에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는 관용은 위험하다. ’갑=악, 을=선‘이라는 이분법이 낳은 발상이다. 다른 방식의 갑질을 부르는 원흉이 될 수 있다.

최근 대구 고등법원에서 공갈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태광공업 및 태광정밀 경영진이 유사한 사례다. 태광은 현대자동차 2차 협력사(벤더)로 1차 벤더인 서연이화의 거래업체다. 태광 회장과 사장은 부자(父子) 관계다.

이들은 회사가 경영난에 처하자 피해자인 서연이화 대표에게 기업 인수를 종용했다. 주식매매 대금 및 위로금을 포함해 50억원을 현금으로 받았다. 떠안고 있던 연대보증 채무 463억원가량 역시 서연이화에 넘기기로 했다. 1심과 2심은 이 과정에서 태광의 공갈·협박이 있었다고 판결했다. 1심은 국민참여 재판으로 진행됐고 2심은 대구고법 판단이다.

태광은 서연이화의 단가후려치기로 경영난이 악화됐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손실규모에 대한 뚜렷한 증거를 내놓지 못한데다 이같은 논리가 공갈·협박 행위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고 꼬집었다. 오히려 개인계좌로 받은 50억원 중 일부를 사적인 용도로 사용했다고 지적했다.

물론 대법원 상고도 남았다. 그러나 1·2심 재판에서 드러난 증거만 놓고 보면 협박 사실을 부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우선 태광은 경영난을 이유로 서연이화에 자금지원을 요청하며 부품공급 중단을 통보했다. 태광은 자동차 도어트림, 휠가드 등 부품을 납품하는 업체다. 대량 생산에 필요한 틀인 금형을 서연이화에게서 위탁받아 독점 공급하고 있었다.

자금지원에 난색을 표현한 서연이화가 금형을 다시 가져갈 것을 염두에 둔 태광 경영진은 트럭 등을 이용해 회사 출입로를 봉쇄했다. 일부 금형 옆에는 신나통을 놓고 부품 생산에 필요한 기재를 파괴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냈다. 거래업체의 재산을 볼모로 잡은 행동이다.

문제해결을 호소하는 서연이화 대표와의 면담 과정에서는 신나통과 야구방망이를 비치한 채 검은 상복을 입고 왼쪽 가슴에는 사냥용 칼을 구비했다. 직원들에 지시해 자사 건물 옥상에서 방화 시위를 하기도 했다.

해악을 끼칠 의도는 없었다는 게 태광 경영진 설명이었지만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재판부도 공갈죄가 인정된다고 봤다.

서연이화가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붙인 태광 경영진은 이후 위로금 및 지분양도 대금을 포함해 50억원을 현금으로 받아냈다. 이때 연대보증 채무 463억6452만원은 서연이화가 책임져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태광 경영진은 채권자인 금융기관이 채무 이전을 승낙하지 않아 재산상 이익은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이 역시 설득력이 떨어진다. 합의서 체결 및 50억원이 오가는 과정에 공갈과 협박이 있었다는 게 사건의 본질이다.

합의서 작성 이후에는 더 많은 문제점이 드러난다. 개인 계좌로 받은 돈은 모두 인출해 현금화했다. 회사나 직원, 채권자 등을 위해 사용됐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현금을 받은 후 태광 경영진 중 하나인 사장과 변호인 사이에 오간 문자는 섬뜩하다. 회장 아들인 태광 사장은 ”어머님 차 사는 건 어찌 생각하시는지? 어차피 뺏기는 돈 뺏기나 차 뺏기나? ㅋㅋ“, ”외환은행 거래 없어서 어머님만 내일 5억 넣을 생각입니다만, 그래서 천천히 돌릴 생각입니다. 오늘 2개 현금화시키고 새마을 금고 4개 넣어서 내일부터 현금화 예정“, ”골드바 어때요?“ 등의 질문을 변호인에게 문의했다. 이 문자를 주고 받은 상대는 합의서 작성에 관여한 변호인이다.

소설이나 영화가 아니다. 모두 재판에서 드러난 증거들이다. 이 사실만 놓고 보면 을의 입장에서 내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해명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결국 국민참여 재판으로 진행된 1심은 태광 회장 및 사장에 각각 징역 2년6개월(집행유예 3년), 징역 3년(집행유예 4년)의 형을 내렸다. 2심 재판부인 대구고법은 각각 징역 2년6개월과 4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상황은 이런데 정치권 일각에선 태광 사례를 놓고 법원과 검찰이 대기업의 갑질 도우미를 자처했다는 말이 나온다. 국가형벌권의 과잉발동이고 하도급사를 손보려는 기획 고소라는 것이다. 지난달 국회에서 진행된 ’하도급 전속거래구조에 있어 국가 형벌권 행사의 비대칭성‘ 세미나를 통해 나온 얘기들이다.

단가후려치기에 시달리던 영세 하도급업체가 어쩔 수 없이 납품을 중단할 경우 이에 대한 형사처벌을 면제하는 법안이 필요하다는 데는 일정 부분 공감한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결이 다르다.

납품 중단이 본질이 아니라 50억원을 받는 동안 벌어진 공갈죄가 핵심이다. 불공정한 하도급 관행에 태광 사례를 대입시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 주객이 전도됐다.

태광 사례가 합당하지 않으니 이를 놓고 법원과 검찰이 갑질 도우미를 자처했다는 비난 역시 표피만 본 해석이다. 이 경우 1심에 참여한 배심원단도 갑질 도우미가 된다.

기획고소라는 주장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갑은 을의 요구를 모두 들어줘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사회적 약자가 항상 옳은 요구를 하는 건 아니다. 갑의 지위에서도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고 이들 역시 법에 구제를 요청할 수밖에 없다. 이를 부정하는 건 갑은 악이라는 프레임에 갇힌 오류다.

그래서 뒷맛이 씁쓸하다. 태광 경영진은 여전히 연간 단위로 단가 인하를 시행한 서연이화가 부도덕한 기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대법원 상고가 진행된다면 어떤 증거가 나올지 두고 볼 일이다.

(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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