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을 뛰어넘은 체험… 역사의 주인공은 민초

김민 기자

입력 2019-02-25 03:00 수정 2019-02-2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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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민미술관 ‘불멸사랑’전
예술가들이 몸으로 겪은 역사… 책 속에 갇히지 않아 더 생생


일민미술관 5층에 있는 신문박물관의 윤전기와 함께 전시된 서용선의 회화 ‘뉴스와 사건’(1997, 1998년·뒤)과 ‘KW 12-0621(02)’(2012년).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그라피티처럼 화려하고 복잡하게 얽힌 그림 가운데 한 여인이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그녀의 옷엔 수인번호와 이름이 한자로 적혀 있다. 서대문감옥에 수감되기 직전 유관순 열사의 모습이다. 그녀의 주변엔 조선인들이 총칼을 든 일제 순사와 엉겨 붙어 이들을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 이 그림은 프랑스 작가 파비앵 베르셰르의 작품, ‘독립기념일’이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역사를 돌아보는 전시가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이런 가운데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의 ‘불멸사랑’전은 책 속의 역사가 아닌 예술가들이 몸으로 겪은 역사를 보여줘 눈길을 끈다. 국내외 작가 6명이 참가해 일민미술관 1∼3층은 물론이고 신문박물관 5층에도 작품이 전시된다.

파비앵 베르셰르의 ‘독립기념일’(2019년). 일민미술관 제공
글이 곧 권력이었던 과거, 역사는 승자의 기록과 마찬가지였다. 한편 이번 전시는 외국인이 체화한 한국의 이미지, 기록에 남지 않은 역사의 이미지를 보여주며 과거 역사의 의미에 의문을 던진다. 일상의 수많은 기록이 온라인에 남겨지는 지금, 역사의 주인공은 곧 개인이라는 의미다.

1층 전시관을 장식한 베르셰르는 서울, 부산, 제주도에 머물며 신화, 전통문화, 역사를 조사한 뒤 이를 이미지로 풀어냈다. “한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빨간 십자가가 인상 깊었다”는 그는 한국인에겐 익숙하지만 자신에게 새로운 이미지를 끄집어낸다. 번화가에서 자주 보이는 풍선 기둥이 현대적 장승으로 느껴졌다는 베르셰르는 흰 풍선 기둥에 그림을 그려 전시장 한가운데에 놓았다.

‘독립기념일’을 그릴 때 기분은 어땠을까. 베르셰르는 한국과 프랑스의 신화, 역사의 유사성이 흥미로웠다고 한다. 그는 “한국의 역사에서 일제는 프랑스가 생각하는 나치와 비슷하다고 느꼈다”며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속 ‘비행기’는 일제를 암시한다고도 하는데, 나는 나쁜 의미를 좋게 포장하거나 정치적 의미를 담기보다 있는 그대로를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단종애사’ 등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표현한 작가 서용선은 신문박물관에 작품을 설치해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딱딱한 활자로 적힌 신문지 위에 강렬한 색채로 그려진 이미지가 놓여 마치 ‘승자의 역사’에 저항하는 듯하다. 박물관에 놓인 커다란 윤전기 뒤에도 대형 회화 작품이 놓였고 ‘호외’ 신문들 앞에는 조각 작품 ‘감시 08’이 있다. 전시장 곳곳에 숨겨진 드로잉 작품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권하윤 작가는 개인의 경험과 기억을 재구성한다. 비무장지대(DMZ)에서 근무했던 병사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489년’은 가상현실(VR) 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다. 또 작가의 스승인 다니엘의 기억을 3차원(3D)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한 작품 ‘새 여인’의 스크리닝 버전도 처음으로 공개된다.

이 밖에도 휴대전화 속 그림을 만화나 웹툰의 형식으로 다시 그려 일상을 기록한 이우성 작가의 작품, 조은지 작가의 퍼포먼스 설치와 영상, 강이연 작가의 영상 설치 작품 등을 볼 수 있다.

4월 13일에는 이인범 상명대 조형예술학과 교수, 서용선 작가, 조주현 일민미술관 학예실장 등이 참가하는 ‘동시대미술과 미디어, 진실과 탈―진실’ 학술세미나도 열린다. 전시는 5월 12일까지. 5000∼7000원.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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