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세대와 모바일 시대 감성 사이에서…

김민 기자

입력 2019-02-21 03:00 수정 2019-02-21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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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공간 루프 20주년 기념전

서울 마포구 대안공간 루프에서 열리고 있는 20주년 기념전. 김은형 작가의 벽화와 함께 그간 열린 전시의 포스터가 연도별로 걸려 있다. 대안공간 루프 제공
타이핑하면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나는 각진 키보드가 놓인 오래된 컴퓨터. ‘PC통신’을 떠올리게 만드는 디자인의 화면을 클릭하면 20년 전 열린 전시의 톡톡 튀는 서문이 쏟아진다.

“최정화말일세… 나는 정말 그의 가벼움을 참을 수가 없었네. 대만 재래시장에서 수입한 플라스틱향 접시 수십 개와 남대문시장의 쇠구슬 수백 개가 만들어내는 유치찬란함, 소란스러움, 뻔뻔함은 나를 짜증나게 만든다네.”

‘의기양양한 예술 애호가 홈즈’라는 필명의 누군가가 1999년 4월 대안공간 루프에서 열린 전시 ‘홍대 앞 재탕 버전으로 보는 최정화―정서영 2인전’에 쓴 서문이다. 최정화는 소쿠리, 대야 같은 플라스틱 제품을 쌓은 작품으로 알려진 설치 작가. 그의 초기 전시 소개글의 독특한 문체에서 90년대 말 예술인들로 북적였던 서울 홍대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이 무렵 홍대 품에서 태어난 ‘대안공간 루프’가 2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하는 전시 ‘예술, 시대의 각인’이 12일부터 서울 마포구 루프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장 입구에 비치된 컴퓨터에선 그간 치러진 164개 전시 목록과 서문을 읽어볼 수 있다. 열린 순서대로 글을 읽어나가며 변화를 포착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초기 글은 도발적인 ‘X세대’의 분위기. 그러다 루프가 점차 ‘기성세대’가 되며 철학적 개념이 섞인 난해한 글이 늘어난다. 이때 논문처럼 길어졌던 글은 최근에서야 다시 간결해졌다. 양지윤 디렉터는 “모바일 영향으로 복잡한 이야기를 서두에 쓰면 지금은 아예 읽질 않는다”고 설명했다.

지하로 내려가면 지금까지 열린 전시 포스터와 각종 자료, 영상을 만날 수 있다. 김은형 작가의 벽화 ‘타임머신’이 전시장에 함께 그려졌다.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연도별 주요 사건을 함께 정리해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보여주려는 의도. 최정화 정연두 함경아 등 2000년대 활발히 활동한 작가는 물론이고 안창홍 정복수 등 비중 있는 중견 작가도 눈에 띈다.

왼쪽부터 루프에서 열렸던 전시들. 2005년 노진아의 ‘나는 오믈렛입니다!!’와 1999년 안창홍 ‘쬐려보다’, 2018년 이은새의 ‘크게 웃는 여자들’. 대안공간 루프 제공
양 디렉터에 따르면 루프는 처음 개관할 당시 해외 유학파 예술가들이 금융위기로 대거 귀국한 게 계기였다. 기존 미술계에서 설 자리를 찾지 못해 세운, 말 그대로 ‘대안공간’이다. 실험적인 미술가를 지원하고, 국내외 미술 흐름을 시민과 공유하는 것이 목표였다. 20년 동안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했는지는 물음표가 붙지만, 수많은 대안공간이 사라졌음에도 루프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최근 열린 젊은 작가들의 개인전 ‘이은새: 밤의 괴물들’이나 ‘권병준: 클럽 골든 플라워’도 관객 호응이 뜨거웠다.

20년을 맞은 루프는 현재 새로운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다. 22일 오후 20년간 루프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한 기획자들이 각자의 경험과 의견을 나누는 대담 프로그램 ‘큐레이터 라운드 테이블’도 열린다. 양 디렉터는 “‘대안’ 공간으로서의 의미에 대한 고민을 지금부터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올해 루프는 공모로 선정한 작가와 기획자의 전시도 선보인다. 민예은 김우진 작가의 개인전과 대만 출신의 큐레이터 지아 전 차이의 전시 ‘We are bound to meet’ 등을 준비하고 있다. 20주년 전시는 3월 3일까지. 무료.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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