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연필로 그린 작품이 북한에선 국보로 선정됐다고? [우아한 청년 발언대]

동아일보

입력 2019-01-22 14:00 수정 2019-01-22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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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화재를 국보로 등록하듯이, 북한도 중요한 문화재와 예술작품들을 국보로 선정하고 있다. 그런데 북한의 국보 선정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그것은 한국의 국보는 ‘제작연대가 오래된 것’을 기준으로 뽑는 반면, 북한에서는 오래된 문화재는 물론이고 현시대의 예술 작품 역시 종종 국보로 등록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대의 북한 국보 중에서도 한국의 기준에서 더욱 이해하기 힘든 사례가 있는데 그것은 연필로 그린 연필화, 즉 소묘 작품들이 국보로 등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국보로 등록된 이 소묘 작품들은 북한의 미술 행사인 전국소묘축전에 출품된 작품들인데, 우리에게는 ‘고작’ 연필로 그린 그림이 국보로 선정되었다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은 연필로 그린 그림이라고 하면 학교나 미술학원에서 학생들이 연습으로 그리는 그림들을 연상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북한에서는 이 연필로 그린 소묘 작품들을 높이 평가하고 국보로 등록하였을까?

이에 답하기에 앞서 소묘라는 것이 북한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부터 살펴보자. 한국의 미술 교육과정과 미술학원에서 그러했듯이 본래 북한의 미술에서 소묘는 중요한 미술 훈련과 기법 중 하나로 여겨졌다. 북한은 예술가들에게 사실주의 작품만을 창작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사실주의에 따라 대상을 현실적으로 그리기 위해서는 연필을 통한 소묘 훈련이 필수적이라 여긴다. 특히 한국전쟁 직후 북한에 파견된 소련의 미술가 변월룡이 소묘를 중요시하는 소련의 미술 교육 과정을 전수한 이후로 현재까지 북한의 미술에서 소묘는 중요한 교육 수단이자 훈련 방법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렇게 소묘가 중요한 미술 훈련 방법으로 여겨졌음에도 2005년까지 북한의 미술계에서는 소묘를 하나의 독립적인 ‘장르’로 취급하지 않았으며 소묘 작품들을 저평가 하는 경향을 보였다. 미술 훈련에서 소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소묘 기법으로 창작된 연필화들은 삽화나 출판미술의 일종으로만 여겨졌을 뿐이다. 북한의 미술에서 소묘가 중요한 장르 중 하나로 인정받고 소묘 작품이 국보로 등록된 것은 2006년의 일이다.

북한의 미술계가 소묘 작품들을 저평가한 이유는 이들이 전통미술인 ‘조선화’를 북한 미술의 정점이자 완성된 미술로 여겼기 때문이다. 조선화란 북한의 전통회화미술을 말하며 우리나라의 한국화와 그 뿌리가 같다. 그러나 현재의 조선화는 한국화와는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북한의 조선화에서는 다양한 색상을 사용하는 채색화가 권장되고 있으며, 단일한 색상을 사용하는 수묵화는 ‘결함’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마지막타입’이라는 제목의 조선화. 지승석 작가의 2015년 작품. ‘타입’은 건물을 지을 때 콘크리트를 부어 넣는 일을 뜻하는 북한의 건축용어다. 김형완 씨 제공.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지배층들은 사회주의사상에 모순되지 않으면서도 민족적인 예술을 발전시킬 것을 예술가들에게 요구한 적이 있다. 북한의 미술계가 그러한 요구에 내놓은 답안이 바로 채색된 조선화였다. 단일한 색상으로 그리는 수묵화는 양반 지배 계층의 미술이지만, 다양한 색상을 사용하는 민화와 채색화는 민중의 미술이라는 것이 이들의 논리였다. 이윽고 색채의 추구는 조선화를 넘어 북한의 회화 미술 전체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채색화가 민족적이고 계급적인 미술이라는 주장에 김일성까지 동조하면서 북한 미술의 채색화 추구는 더욱 공고해졌다. 1966년 김일성은 미술가들과의 담화에서 민족적인 장르인 조선화를 중심으로 북한의 미술을 발전시킬 것을 지시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비(非)채색화들을 조선화의 ‘중요한 결함’으로 지적한 것이다.

북한의 예술, 예술가, 예술작품, 창작과 배포 과정은 전부 조선노동당에 의하여 통제되고 있으며, 이러한 당의 권한에 대해 예술가가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예술가들은 당에 절대적으로 충성할 것이 요구된다. 이렇게 예술에 대해 전체주의적 통제를 실시하는 조선노동당의 정점에는 김일성이 있었다. 김일성은 북한 권력의 최상층에 있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미술의 최상층에도 존재한다. 비채색화는 결함이라는 김일성의 주장에 대해 반박할 수 있는 북한 미술가는 단 한명도 없었다. 누가 감히 김일성과 그의 미적감각에 반기를 들 수 있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채색을 하지 않는 소묘 작품들이 저평가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데 2005년부터 소묘의 위상은 갑자기 달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비채색화를 배척할 것을 주장하였던 김일성의 아들인 김정일이 소묘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2005년 4월, 어느 한 병사가 군부대에서 소묘 작품들이 김정일에게 높은 평가 받은 것을 계기로, 소묘가 중요한 장르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병사의 소묘 작품들은 편집 및 인쇄되어 모든 북한군 중대와 전국에 배포되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김정일은 소묘 미술의 대중화를 명하였는데, 그 직후 북한의 언론에서는 ‘소묘바람’이라 불리는 소묘의 유행이 북한 전역에 번져 나가고 있다고 여러 번 보도하였다. 김정일이 소묘를 하나의 장르로 격상시키고 대중적인 미술로 발전시켰다는 이유로 소묘의 변화는 곧 김정일의 업적으로 여겨지기 시작하였다. 과거에 소묘를 고평가하는 것이 김일성에 대한 도전이었다면, 이제는 소묘 장르를 저평가하는 것이 김정일에 대한 도전이 되었다. 소묘는 김정일의 업적이 되었고 반드시 성공적으로 전파되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묘가 국보로 지정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몸소 병사의 소묘화첩을 보아주시며’라는 제목의 북한 소묘. 박창룡 작가의 2006년 작품으로 북한의 국보로 지정됐다. 김형완 씨 제공.

이듬해인 2006년 2월에는 김정일의 생일에 맞춰 제1차 전국소묘축전이 개최되었다. 이 전국소묘축전에서는 북한의 지도자를 그리는 회화작품인 ‘영상작품’이 최초로 소묘로 제작되어 전시되고 국보로 지정되었다. 과거 지도자를 그리는 작품으로는 조선화와 유화로만 창작되었던 것을 고려하면 이는 분명 파격적인 변화였으며, 소묘의 장르화(化)라고 할 수 있다. 훈련 수단으로 여겨지던 소묘가 김정일 통치기의 대표적인 미술 중 하나로 등극하는 데에는 채 1년도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소묘가 중요 장르가 된 것은 분명 북한 정치가 개입한 결과이다.

결국 북한의 미술에서 소묘가 장르인지 아닌지를 결정한 주체는 결국 정치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의 정치권력이 예술을 도구화하고 당의 종속시킨 결과이다. 이러한 상황은 2019년 현재에도 변함이 없다. 김정은 통치기에 들어와서는 김정은의 정치사상인 ‘김일성-김정일주의’와 ‘김정일 애국주의’가 소묘 작품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가장 최근에 열린 2018년 제7차 전국소묘축전에서는 북한이 당시의 가장 큰 업적으로 여겼던 미사일 개발을 주제로 한 소묘 작품이 매우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북한에서 소묘는 여전히 정치의 도구로 쓰이고 있다.

소묘의 장르화가 북한의 정권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그렇다고 전체주의적인 면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북한이 대중의 소묘 창작을 독려함으로 인해 북한의 대중이 미술 창작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가 확대되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또 소묘 장르의 출현으로 인하여 조선화와 같은 주요 장르에 치중해있던 북한의 미술이 좀 더 다각화되었음 역시 높이살만하다. 그런데 아직도 북한의 미술을 바라보는 한국의 시각은 조선화에 치중한 감이 있다. 조선화는 분명 북한 최고의 회화미술이다. 그러나 북한에는 조선화 말고도 다양한 장르의 미술들이 발전하고 있다. 한국에서 좀 더 다각화된 북한 미술의 면모들이 소개되기를 희망한다.

김형완 북한대학원대학교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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