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경숙 고려사이버대 교수 / ‘봉골레 12 그릇’

동아일보

입력 2019-01-17 08:00 수정 2019-01-17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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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이버대 문화예술경영학과 이경숙 교수

딸아이가 한 때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엄마 내일 00기업 임원 12명 단체 예약이라 저녁에도 나와 달래’. 딸아이도 처음하는 대기업 임원진 단체 예약에 긴장과 설레임을 보였다. 많은 손님에게 복잡한 메뉴의 음식들을 실수없이 전달했을지 약간 걱정도 되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딸을 보자마자 어땠는지 물었더니 표정이 묘했다.

“엄마! 제일 윗 분이 봉골레 주문했거든. 모두 봉골레 하는 거야, 그냥 봉골레 12그릇 내갔어!” 딸의 묘한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잔뜩 긴장하고 나갔던 일이라 허무하기도 했고, 바쁜 점심 중국집도 아닌데 12명의 동일 메뉴를 처음 접해 난감했던 것 같다. 나 또한 ‘봉골레 12그릇’이란 말이 놀라웠고,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사회적으로 칭찬받는 대기업의 조직 생활을 몰래 훔쳐본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AI와 4차산업혁명을 화두로 하는 이 시대에 ‘봉골레 12그릇’은 그렇게 내 머릿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로부터 ‘봉골레 12그릇’과 비슷한 무늬의 일들을 관심있게 지켜보며 자신에게 질문하게 되었다. 한국 사회의 집단동질성과 주류 중심의 위계적 구조가 개인이나 집단의 일상을 통제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일상은 어떤가?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집단의 양식과 에토스로부터 자유로운가? 권력의 미시적 작동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나 또한 한국 사회 주류 집단과 규범에 부응하며 조직과 사회에서 튀지 않고 인정받으려 무척 애쓰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채식주의자이다. 채식주의자임을 선포하고 20여년을 살면서 동류의 사람을 만난 것은 거의 손꼽을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소수자로서 지내왔다. 비채식인인 가족들은 나를 이해하니 관계없었으나 조직이나 사회에서 나의 채식 생활로 인해 타인에게 불편을 끼치지나 않을까 늘 염려했다.

특히 회식 후 2차 자리는 거의 가지 않고 지낸 적도 많았다. 직장에서는 이미 알려져 나의 채식 성향을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공적인 외부 회의나 평가에 참여한 후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불가피하게 식사를 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채식주의자임을 밝혀야 한다.

그 때부터 모든 시선은 나에게 집중되고, 식사 내내 질문이 쏟아진다. 질문하는 사람들의 눈빛이 반짝인다. 어디서 희귀동물이 나타났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언제부터 채식했어요?”, “꽤 됐어요...” “채식하는 이유는 뭐예요?” “채식이 좋은 삶인 것 같아서요(그 때 그 때 답은 조금씩 다르게 표현된다)”. “종교 때문은 아닌가요?” “안 불편해요?”, “가족도 채식하나요?”, “아이들 밥은 어떻게 해줘요?”.... 거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나는 나의 세계관, 종교관, 요리법 등 그야말로 사적인 영역까지 탈탈 털려야 한다.

어떤 경우는 “제가 칼을 들고 있어서 주는 대로 먹어요”라고 답하기도 한다. 식생활 방식이 다르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나 자신에게도 불투명한 나의 신념부터 생활방식까지 끝없이 설명을 요구받는다. 식사 자리에서 질문이 나오기에 혹여 분위기를 망치지나 않을까, 채식주의자에 대한 오해를 낳을까봐 주저리주저리 설명한다. 그러고 보니 권력이 없는 사람이나 소수자는 늘 무엇인가 설명을 요구받고, 애써 주류를 이해시키려 무진 애를 쓰며 살고 있다. 그럼에도 인정받기는 힘들다.

이런 경험을 통해 일상의 질문하기나 말걸기가 누군가에게는 불편이나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느꼈다. 질문에 답해야 하는 사람의 위치나 감정은 집단 에토스나 보편성 앞에 무기력하게 휘둘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렇지 않게 하는 질문이 누군가에게는 말하거나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을 드러내도록 강요한다. 그러한 질문은 질문으로서 자격과 예의를 갖추고 있는가? 이미 질문에 사회적 기준과 평가가 개입되어 상대방을 재단하고 있지는 않을까? ‘왜 혼자 살아요?’ ‘언제 아이 낳을래?’ 등의 질문도 그렇다.

주로 투명하게 자기 자신을 설명하도록 요구받는 존재는 주류와 다르거나 소수자, 힘없는 사람인 것 같다. 오히려 주류 집단이나 권력자가 주류의 규범이나 보편성은 윤리적이고 타당한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질문받도록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질문이 풍성할 때 ‘봉골레 12그릇’이 다양한 메뉴가 되어 함께 성찬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이경숙 고려사이버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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