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정동]지속의 가치

이정동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입력 2018-10-05 03:00 수정 2018-10-05 03:00

|
폰트
|
뉴스듣기
|
기사공유 | 
  • 페이스북
  • 트위터
알파고-이세돌 바둑 대국 이틀 뒤 정부는 인공지능 산업전략 발표
“5년간 1조 투자계획” 어디 갔나
기업도, 정부도 단기성과에 급급… 지속 없이는 노벨상도 어림없다


이정동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누구나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한국 기업의 수년 전 이야기다. 경기를 제법 타는 업종인데, 한때 경기가 나빠지면서 마른수건 짜내기식 경영을 시작했다. 정해진 수순처럼 가장 먼저 돈만 쓰고 결과는 없는 연구조직을 사실상 해체에 가깝게 구조조정했다.

슬픈 예감이 든 것은 이때였다. 얼마 안 가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기 위해 연구조직을 대폭 확대하겠다는 이야기를 할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리더가 바뀌고 경기가 다시 돌아오는 기미가 보이자, 대대적인 신사업 발굴 계획과 최고급 연구인재를 확보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 홍보성 기사로 떴다.

그 이후 전개된 사정은 보나 마나다. 새로운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를 모았지만, 알고 보니 이전에 하다가 중단된 것들이었다. 새롭게 꾸린 팀은 서로 손발을 맞추는 데도 시간이 모자랐다. 대부분의 시간과 돈이 이전 수준을 겨우 회복하는 데 들어갔다. 이런 저간의 소문을 알고 있는 우수 인재들은 그 회사 이야기가 나오면 아예 손사래를 쳤다.

기업 자료를 바탕으로 통계분석을 해보면, 흥미롭게도 연구개발 투자를 많이 한 기업이 아니라 꾸준히 투자한 기업의 성과가 더 좋게 나온다. 쉽게 말해서 올 한 해 화끈하게 10억 원을 썼다가 마음이 변해서 10년간 투자를 하지 않는 기업보다, 5000만 원씩이라도 10년간 꾸준히 연구개발에 투자한 기업이 훨씬 성과가 좋다는 이야기다.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혁신을 시도할 때 변덕스러운 10억 원보다 꾸준한 5억 원이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인데, 사실 이 이야기는 피트니스센터에서 조금이라도 운동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미 몸으로 아는 상식이다. 왠지 운동하고 싶은 날 10시간 동안 단내가 나도록 운동하고 한 주일 내도록 코빼기도 안 비치는 사람보다, 30분이라도 매일 꾸준히 운동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 기술혁신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많이 투자한다고 역량이 쌓이는 게 아니다. 꾸준히 지속하는 가운데, 경험이 재해석되고 연결되면서, 고유한 역량으로 쌓이게 된다. 이것이 지속으로부터 얻는 숙성의 힘이다.

비단 기업뿐만 아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 이와 같은 단기주의가 넘친다. 2016년 3월 9일부터 15일까지 알파고가 이세돌과 바둑 대국을 가지면서 한국 사회에 큰 충격파를 던졌다. 놀랍게도 바로 이틀 뒤인 3월 17일 정부는 한국형 알파고 개발을 목표로 내걸고 인공지능산업 발전을 위한 국가적 전략을 발표했다. 5년간 1조 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이 신문기사의 머리글로 달렸다. 당시 국제적인 과학저널 ‘네이처’에서도 알파고에 대한 한국의 급조된 대응을 우려하는 기사가 실렸을 정도다. 그러거나 말거나, 불과 6개월 남짓 후인 10월에 인공지능연구소가 실제로 설립되었다. 흔히 보던 속전속결이다.

안타깝게도 불과 2년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 굵은 글씨로 씌어있던 1조 원과 인공지능연구소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새로운 개념을 접하고 나서 긴급대책을 내어놓고, 초단기로 자원을 몰아 투자해서 유형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놓지만, 결국 지속하지 않는 습관은 데자뷔처럼 계속 반복되고 있다.

지속성이 중요하기로는 기초과학만 한 분야가 없다.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일본의 혼조 다스쿠 교토대 특별교수도 시대를 바꾸는 연구를 한 비결 중 하나로 지속(Continuation)을 꼽았을 정도다. 지속이 없이는 노벨상은 언감생심이다.

2000년대를 넘어서면서 우리나라도 진정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단기적이고 산업적인 성과를 넘어 인류의 지식지평을 넓혀나가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풀뿌리형 기초연구 지원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기초연구 가운데서도 대형 시설이 필요하거나 집단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분야에 도전하기 위해 기초과학연구원(IBS)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심지어 이 분야에서도 같은 습관이 반복되고 있다. 왜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지 못하냐는 독촉은 이곳저곳에서 쏟아지고, 안정적이어야 할 연구단별 예산도 애초의 계획과 달리 계속 삭감되고 있다.

한국 사회도 어느덧 선진국의 외형을 갖추었다. 이제 내면도 알찬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단기간에 집중투자하고 지속하지 않는 습관부터 버려야 한다. 작더라도 꾸준히 투자하고 쌓아가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묵은 별빛의 씨앗을 꾸준히 키우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정동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라이프



모바일 버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