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사회]‘현금 귀차니즘’ 확산…동전 결제하는 사람은 악당?!

권기범기자 , 박광일기자

입력 2018-06-22 17:12 수정 2018-06-22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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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원까지는 참을 만한데 그 이상은 어휴….”

올 초 충남 모 편의점에서 일했던 이모 씨(25·여)는 ‘종이컵 아저씨’를 잊지 못한다. 소주와 안주거리를 잔뜩 집어온 이 아저씨는 물건값 3만 원 가운데 1만 원 넘는 돈을 동전으로 냈다. 100원과 500원 짜리 동전이 종이컵 두 개에 가득했다. 이 씨는 진땀을 흘리며 돈을 셌다. “빨리 빨리 좀 하라”고 아저씨가 재촉하자 울컥하기도 했다. 이 씨는 “현금을 내는 손님이 무슨 잘못이 있겠냐마는 귀찮은 건 어쩔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편의점이나 카페 등지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이나 직원에게 요즘 현금, 그것도 동전은 공포의 대상이다. 동전을 가져와 계산하는 손님은 ‘동전 빌런(악당을 뜻하는 영어)’이라고 불린다. 미국 슈퍼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악당을 빗대 일하기 귀찮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비꼬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계산하기 어렵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현금 자체를 번거롭게 여기는 ‘현금 귀차니즘’ 증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귀찮다’라는 말에 주의(主義)를 뜻하는 영어 접미사 ‘이즘(-ism)’을 붙여 만든 귀차니즘은 어떤 현상이 만연해 귀찮을 정도라는 뜻이다.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현금 결제 비율은 2014년 17.0%에서 2016년 13.6%로 계속 줄고 있다. ‘현금 없는 사회’로 빠르게 나아가는 한국사회 단면이 현금 귀차니즘인 셈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신용카드 수수료나 세금이 아까워 현금 지불을 권하는 소규모 상점이 많았다. 최근에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직장인 김모 씨(35)는 며칠 전 동네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시키고 현금을 내밀었다. 그러나 아르바이트생은 “카드 없느냐”며 한숨을 푹 쉬었다. 김 씨는 “작은 가게라 현금을 반길 것 같아 일부러 가져갔는데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택시에서 기본요금이 나와 5000원짜리 지폐를 냈다가 “그냥 카드로 하시라”며 택시기사에게 핀잔을 들었다는 승객도 있다.

한 푼 두 푼 모은 동전을 슈퍼에 가져가면 “기특하다”고 칭찬 받던 시대는 지났다고 이들은 입을 모은다. 서울 종로구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조모 씨(25)는 “동전을 내면 세는 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나중에 정산하다 틀릴 수도 있으니 아무래도 귀찮은 존재”라고 말했다.

미취학 아동들에게는 ‘돈=현금’이라는 공식도 잘 먹히질 않는다. 워킹맘 박모 씨(39)는 7세 딸에게 경제관념 공부를 시키겠다며 “돈이 뭐냐”고 물었다 깜짝 놀랐다. 딸이 팔을 들어 위에서 아래로 내려 그은 것이다. 식당에서 카드 결제하는 모습을 흉내 낸 것이다.

현금 귀차니즘이 업무 혁신을 불러오기도 한다. 커피전문점 스타벅스는 매장 평균 현금 결제율이 한 자릿수로 떨어지자 올 4월 ‘현금 거래 없는 매장’ 3곳을 지정해 시범 운영했다. 도입 50일 만에 3곳 현금 결제율은 0.2%까지 떨어졌다. 직원들이 정산하는 데 드는 시간도 하루 평균 50분씩 절약됐다. 시범 매장 점장인 이상엽 씨(30)는 “정산한 뒤 100원, 200원이 빌까 걱정하는 직원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스타벅스는 현금 없는 매장 확대를 검토할 예정이다.

이영애 인천대 소비자아동학과 교수는 “휴대전화 간편 결제 서비스 등이 늘면서 지갑 대신 머니클립을 쓰는 사람이 늘지 않았느냐. 현재 소비문화에서 현금 사용은 생소한 행동이 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박광일 기자 light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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