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을 싱가포르처럼… 경제특구 개발로 개방체제 실험

조성하 전문기자

입력 2018-06-09 03:00 수정 2019-01-07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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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北 “원산 카지노에 美 투자해달라” 요청한 이유는

불야성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북한 ‘제2도시’ 원산의 야경. 북한은 원산-금강산 국제관광특구에서 원산을 따로 떼어 ‘원산갈마지구’로 지정한 뒤 관광특구로 개발하는 방안에 공을 들이고 있다. 사진 출처 우리민족끼리
최근 북한이 원산에서 추진 중인 카지노 개발사업에 미국 기업이나 자본이 투자할 수 있도록 미국 정부에 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관련 사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미 국내 증시에서는 GKL, 파라다이스 등 카지노 업체 주식이 관심 종목으로 떠올랐다. 북한도 5일자 노동신문을 통해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 건설과 관련한 기사를 내보내는 등 미국 자본 유치를 위한 ‘애드벌룬 띄우기’에 나섰다. 관련 업계에서는 북한이 원산 프로젝트에 역점을 기울이는 것이 일제강점기 동북아시아의 대표적인 휴양지였던 원산의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 원산은 교통의 요지이자 한국 스키의 발상지

일련의 움직임에서 가장 먼저 드는 궁금증은 원산을 투자 후보지로 선정한 이유다. 남한을 겨냥한 관광특구라면 서울에서 가까운 개성도 있고, 금강산은 인프라가 잘돼 있어 시너지도 큰 곳이다.

원산은 두 곳을 뛰어넘는 전략적인 요충지이다. 원산은 강화도조약(1876년)으로 강제 개항된 세 곳(인천 부산) 중 하나다. 일제강점기에는 무역항으로 이름을 날렸다. 북송선 만경봉호 항로가 니가타∼원산인 것도 이런 배경을 갖고 있다. 원산은 대(對)러시아 통로이기도 해서 원산∼함흥∼청진을 잇는 철도는 러시아 하산으로 이어진다. 일제가 원산 개항을 요구한 것도 러시아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한 전략 차원에서 이뤄진 조치였다.

가곡 ‘명태’(1951년 작곡)에는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라는 구절이 있다. 무역항 원산의 넉넉함을 읊은 대목이다. 일제가 철도를 부설할 때도 원산의 우선순위가 높았다. 일제는 1912년 부제(府制·전국 대도시 12개를 부로 개칭)를 도입해 철도를 12부 중심으로 가설했다. 경성(서울)∼원산부를 잇는 경원선은 그 이듬해 개통됐다.

덕분에 원산은 동해안 지역 철도의 중심이 됐다. 북동으론 하산, 북서론 평양 신의주를 거쳐 중국 단둥, 남서(경원선)로는 평강 철원을 거쳐 경성(서울), 남쪽으로는 안변 통천 고성을 거쳐 양양(강원·동해선)으로 이어졌다.

원산은 스키 휴양지로도 유명했다. 한겨울의 풍성한 눈과 스키를 탈 만한 자연지형이 큰 몫을 했다. 그 눈은 동해와 후방의 마식령산맥의 합작품. 북서 계절풍에 밀린 따뜻한 동해의 다습한 공기는 원산을 에워싼 산맥을 타고 상승하며 눈으로 변해 온 산을 덮었다. 마식령산맥 곳곳에 스키장과 함께 온천 료칸과 산장이 들어서며 원산은 스키 휴양지로 발전했다. 작고한 원로 스키어 엄익환 씨(살로몬코리아 전 대표)에 따르면 1930년대 용산역에는 스키구락부(클럽)가 있어서 스키를 거기 보관하며 주말마다 경원선 열차로 원산에서 스키를 즐기는 문화가 있었다.


○ 금강산과 연계한 관광벨트 가능

1938년 8월 동아일보에 연재된 ‘영동십주홍조기’의 7회분 지면. 화진포를 소개한 이 기사엔 별장에서 휴가 중인 외국인 선교사의 모습과 인터뷰가 실려 있다.
원산의 위도는 북위 39도. 그런데도 한겨울에 온화하다. 따뜻한 동해, 병풍처럼 감싼 마식령산맥 덕분이다. 앞바다(영흥만)도 잔잔하다. 북쪽 호도반도와 남쪽 갈마반도, 20여 개의 앞섬이 천연 방파제 역할을 해서다. 원산은 한반도의 서양식 리조트 발상지이기도 하다. 1910년대 외국인 선교사들이 갈마반도에 별장을 많이 지었다. 풍토병 저항력이 약했던 이들은 여름이면 전염병을 피해 오지에 모여 함께 지냈는데 갈마반도를 찾은 건 휴양지로서 입지조건을 두루 갖춰서다. 바다와 산, 황금모래 해변과 호수다. 이들은 중일전쟁을 준비하던 일제가 활주로 사업지로 갈마반도를 지목하자 어쩔 수 없이 별장을 옮겼다. 그게 화진포(강원 고성군)의 이기붕 별장과 옛 김일성 별장이다.

북한이 원산∼금강산을 연계시켜 개발하는 배경은 동해안을 끼고 있는 관광자원이 빼어나서다. 핵심은 석호(潟湖)와 해변. 일제강점기의 동해선(양양∼원산·현 금강산청년선) 철도는 7개에 이르는 석호를 끼고 가설됐다. 해안 석호는 조류에 의해 형성된 사주(沙洲·모래톱)로 에워싸인 것으로 유독 원산∼강릉 해변에 발달했다. 강원도의 경포 화진포 송지호도 해안 석호다. 북한의 동정호 시중호 신광호 삼일포 감호 등은 난개발로 제 모습을 잃은 남한의 석호와 달리 잘 보존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측 계획은 원산∼금강산 고속철도(90km) 가설이다. 하지만 금강산청년선 옛 철길로 달리며 호반과 해변을 감상하는 것도 운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구간의 풍경은 1938년 동아일보를 통해 확인됐다. 당시 조중옥 기자는 연재물(총 7회) ‘영동십주홍조기(嶺東十洲鴻爪記)’를 통해 호수와 해변의 어울림이 절묘한 이 지역 경관을 상세하게 전달했다. 당시 해변에는 해수욕객도 있었다.

남북이 이 지역 관광사업을 함께 이끈다면 금강산지구도 훨씬 매력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크다. 백마고지역에서 종단된 경원선 철도를 원산까지 잇고 철거된 금강산관광선(철원역∼내금강역·1931년 전 구간 개통)을 재건한다면 가능한 얘기다. 경원선은 의정부 동두천에 이어 민간인통제지역의 월정리역을 지나 북한의 평강 삼방협 석왕사 안변을 거쳐 원산까지 달린다. 경성전기(일본회사)의 사설 철도였던 금강산관광선은 평강 김화 회양을 거쳐 내금강까지 이어지는 관광전용열차. 이게 복원되면 철원을 기점으로 금강산을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 순으로 관광할 수 있다. 또 외금강에선 금강산청년선으로 원산을 오르며 동해변과 호수를 감상할 수도 있다.

금강산과 원산 사이에 있는 고성, 통천, 안변에도 명승지가 많다. 관동팔경의 총석정(통천)이 대표적이다. 이 해안단구의 바위 품새는 예술품 경지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통천의 감탕(甘湯·석호호반에서 샘솟는 미네랄 함유 광천수)도 훌륭한 관광자원이라고 북한 측은 강조한다. ‘원산-금강산 관광지구 개발 총계획’에는 수(水)치료 기법 휴양지로 정해져 있다. 동해북부선(제진∼안변) 철도는 남북 간에 이미 이어져 시험운행(2007년)까지 마친 상태다.


○ 카지노를 선택한 배경은

북한이 카지노 투자 요청 카드를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우선 카지노가 확실한 캐시카우(Cash cow·확실한 돈벌이가 되는 상품)라는 점에 주목한다. 북한은 이미 나진·선봉지구에서 카지노를 운영하면서 짭짤한 돈벌이 수단이 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카지노가 노동집약적인 산업으로서 고용 창출 효과가 막대하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카지노는 24시간 가동돼야 한다. 따라서 인력이 3교대 시스템으로 운용돼야 하는 특수한 사업장이다. 여기에 카지노와 함께 가동되는 컨벤션도 한두 시간 남짓한 식사시간에 수천 명에 달하는 고객에게 식사를 제공해야 하므로 인력 수요가 많은 사업이다.

카지노를 운영함으로써 국제금융권으로 자연스레 진입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카지노는 칩 발행을 통해 ‘중앙은행’의 발권 기능을 보유한다. 게다가 하이롤러(고액 베팅자)의 경우 크레디트(노름빚)로 도박을 하는 게 관행이어서 모든 카지노는 국제적으로 은행과 긴밀한 관계를 지닌다. 그 카지노가 미국 것이라면 북한 지역에 있더라도 이런 시스템에 무리 없이 편입되므로 북한 금융시장의 지위 상승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미국 카지노가 북한에 개설된다면 이는 곧 미국 연방 재무부가 미국 내 금융권에 요구하는 수준의 통제와 규제를 받게 된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미국 카지노에 요구되는 준법성은 그 카지노가 투자한 외국의 카지노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이 북한에 카지노를 개설한다면 당연히 그 기업은 미국과 똑같은 수준의 통제와 규제 장치를 요구받고, 이를 갖춰야만 영업을 개시할 수 있다. 결국 북한 금융시스템이 미국 수준으로 개선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소통하기에 적절한 사업 분야라는 지적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럼프 타지마할 호텔 앤드 카지노, 트럼프 플라자 호텔 앤드 카지노, 트럼프 마리나(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 등을 직접 짓고 운영까지 했던 카지노 전문가이자 부동산 투자의 달인이다. 따라서 자신에게 익숙한 사업 분야인 만큼 투자 허용 결정을 손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관광 전문가들은 미국이 원산 카지노에 대한 투자를 허용할 경우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일 만한 곳으로 셸던 애덜슨 회장(85)의 라스베이거스 샌즈를 꼽는다. 애덜슨 회장은 마카오에 베네시안마카오, 샌즈마카오를 설립하며 마카오의 변신을 주도한 미국 최대 카지노 재벌이자 복합리조트 창안자이다. 그는 2013년 한국을 방문해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10조 원 규모의 초대형 복합리조트를 서울에 짓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가 요구한 사업 대상지는 잠실야구장 자리. 하지만 오픈 카지노에 대한 부정적인 국내 여론을 우려해 박 시장이 소관사항이 아니라고 사실상 거절해 사업은 중단됐다.


○ 원산을 싱가포르처럼 만들 수도




북한의 바람대로 미국이 원산 카지노에 대한 투자를 허용하게 되면 원산-금강산 개발 총계획의 화룡점정이 될 것으로 보인다. 2011년 12월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 오르며 권좌를 물려받은 김정은은 2013년에 접어들면서부터 관광산업 육성에 공을 들였다. 그 핵심에 원산-금강산 개발 총계획이 자리 잡고 있다.

삼지연(백두산) 어랑(칠보산) 갈마비행장(원산)을 군용에서 민수용으로 바꾼 것은 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조치였다. 김 위원장은 이어 4개월 뒤인 2013년 5월 경제개발구정령(법)을 발표했다. 외국인 투자가 가능한 특수경제지대(경제특구 1개와 지방급 경제개발구 13개) 설치법이다. 동시에 원산-금강산지구(국제관광개발) 총계획도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해 말 마식령스키장이 완공됐다.

이듬해인 2014년엔 벽두부터 마식령스키장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데니스 로드먼, 안토니오 이노키, 주평양 외교사절 등을 현지로 초청했다. 같은 해 4월엔 단둥∼평양 국제열차를 이용하는 중국인 관광이 시작됐다. 5월에는 미국 러시아 중국 등의 관광 개발 전문가들을 초청해 원산-금강산 개발 총계획에 대한 토론회도 열었다. 하지만 이 같은 노력에도 기대했던 중국 러시아 등 외국인 투자가 지지부진해지면서 사업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카지노가 들어선다면 주변 인프라가 구축된 상태이므로 컨벤션 쇼핑몰 테마파크 콤플렉스가 한데 들어선 복합리조트를 만들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 원산을 동북아 관광거점도시로 육성하는 전략도 탄력을 받게 된다.

전문가들은 원산을 도시국가인 싱가포르처럼 개발할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원산을 ‘1국 2체제 형태’ 혹은 ‘특별경제구역’으로 지정한 뒤 일종의 도시국가처럼 운영하며 개방체제를 실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일각에서는 정치수도 평양, 경제수도 원산의 이분화 전략이 진행될 가능성도 언급한다.

조성하 전문기자 summ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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