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박선희]탐식의 시대를 정복한 슴슴한 맛
박선희 문화부 기자
입력 2018-05-30 03:00 수정 2018-05-30 03:00
박선희 문화부 기자
얼마 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찾았다가 어린이 전시실 한편에 메모지가 가득 붙은 코너를 봤다. 통일이 되면 하고 싶은 일을 써 붙이는 곳이었는데 맞춤법도, 글씨도 엉망인 아이들의 귀여운 글씨가 가득했다. 어떤 바람을 썼나 싶어 찬찬히 읽어봤는데, 한결같이 쓴 말은 이랬다. “평양냉면 먹고 싶어요!”냉면의 인기는 익히 알았지만 그래도 놀라웠다. 경원선 신탄리역에 멈춘 철마를 타고 북한을 횡단한다거나, 백두산이나 금강산을 보고 싶다는 각양각색 바람이 있겠거니 했는데, 요즘 아이들에게 통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냉면’이 된 것 같았다.
원래 냉면은 아이들 입맛엔 어렵다. 평양냉면은 좀더 그렇다. 심심한 고기 육수에 메밀 면을 만 평양냉면은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이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인증 열풍까지 부르며 본격적으로 화제가 된 건 최근 일이다. 음식 관련 프로그램에 자주 소개되면서 미식가들이 즐기는 ‘어른스러운 음식’으로 자리매김하게 됐기 때문이다.
‘초딩 입맛’으론 그 진가를 알 수 없다는 ‘평부심’(평양냉면에 대한 자부심을 뜻하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평양냉면은 일종의 문화현상이 됐다. 화룡점정을 찍은 건 올해 봄이다. 남북 정상회담 만찬에 오른 뒤에는 이렇게 ‘진짜 초딩’의 입맛까지 접수해버렸으니 말이다.
탐식의 시대, 한국인 ‘먹방 투어’의 영역이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 요즘은 백종원이 진행하는 tvN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처럼 아예 해외로 직접 가 제대로 된 원조를 즐기는 음식방송도 화제다. 단순한 먹방을 넘어 음식의 유래, 지역문화와 전통을 살피며 지적 욕구까지 충족시켜준다. 하지만 ‘냉면의 원조’만큼은 슬픈 예외였다. 진짜 평양냉면 맛을 궁금해 했던 건, 생방송에서 시식에 나섰던 미국 CNN 진행자들이나 옥류관 냉면 맛을 상상만 해야했던 우리나 마찬가지였다.
“함흥은 없고 냉면만 남았다//함경남도 바닷가/집은 멀고 고향 잃은 음식이다…잇몸을 간질이는 면발을 끊어내며//척척 감아 날래 먹고 나면/왠지 섭섭한 음식//함흥은 못가고 냉면만 먹는다.”(이상국의 시 ‘함흥냉면’에서)
먹고 나서도 왠지 섭섭했던 그 맛이 평양냉면이라고 다를까. 연일 초여름 더위가 이어진다. ‘평냉 입문자’도 즐길 수 있다고 알려진 서울의 유명 냉면집들은 이른 저녁부터 골목 안쪽까지 긴 줄이 생긴다. 지금껏 냉면은 평양이든 함흥이든, 그곳은 없고 냉면만 덩그러니 있던 ‘망향의 음식’이었다. 하지만 그 슴슴한 맛이 ‘미식의 관문’이 됐고, 이제는 ‘통일의 상징’으로 거듭나고 있다. 북-미 정상회담까지 앞둔 올해 다시 돌아온 ‘냉면의 계절’은 그래서 한층 각별하다. 메모지에 비뚤비뚤 쓴 아이들의 ‘맛있는 꿈’이 이뤄지길 함께 바라본다.
박선희 문화부 기자 teller@donga.com
비즈N 탑기사
- 상하이 100년간 3m 침식, 中도시 절반이 가라앉고 있다
- 김지훈, 할리우드 진출한다…아마존 ‘버터플라이’ 주연 합류
- “도박자금 마련하려고”…시험장 화장실서 답안 건넨 전직 토익 강사
- 몸 속에 거즈 5개월 방치…괄약근 수술 의사 입건
- 일본 여행시 섭취 주의…이 제품 먹고 26명 입원
- “1인 안 받는 이유 있었네”…식탁 위 2만원 놓고 간 손님 ‘훈훈’
- 10만원짜리 사탕?…쓰레기통까지 뒤져 찾아간 커플
- 꿀로 위장한 고농축 대마 오일…밀수범 2명 구속 송치
- 송지아·윤후, 머리 맞대고 다정 셀카…‘아빠! 어디가?’ 꼬마들 맞아? 폭풍 성장
- 한소희 올린 ‘칼 든 강아지’ 개 주인 등판…“유기견이 슈퍼스타 됐다” 자랑
- 공사비 30% 뛰어… 멀어지는 ‘은퇴뒤 전원주택’ 꿈
- 둔촌주공 38평 입주권 22억 넘어…잠실 ‘엘리트’ 추격
- 물 건너간 ‘금리인하’…집값 반등 기대감에 ‘찬물’ 끼얹나
- “팔겠다” vs “그 가격엔 안 사”… 아파트거래 ‘줄다리기’에 매물 月 3000건씩 ‘쑥’
- “AI, 유럽 주방을 점령하다”… 삼성-LG 독주에 하이얼 도전장
- 빚 못갚는 건설-부동산업체… 5대銀 ‘깡통대출’ 1년새 26% 급증
- “옆건물 구내식당 이용”…고물가 직장인 신풍속도
- 사과값 잡히니 배추·양배추 들썩…평년보다 2천원 넘게 뛰어
- “당하는 줄도 모르고 당한다”…SW 공급망 해킹 늘자 팔 걷은 정부
- IMF “韓, GDP 대비 정부 부채 작년 55.2%…5년뒤 60% 육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