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사회]“새 엄마가 싫지는 않지만 ‘엄마’라고 부르긴 싫어요”

황태호 기자 , 이지훈 기자

입력 2018-05-28 19:30 수정 2018-05-28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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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빠와 저는 ‘냉전 중’입니다. 아빠는 툭하면 제게 “날 무시하는 거냐”며 화를 내시죠. 저와 아빠가 싸우는 이유는 제가 공부를 안한다고, 게임을 한다고, 사고를 쳐서도 아닙니다. 제가 3년 전 재혼한 아빠의 새 아내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아서죠.

전 새 ‘엄마’가 싫지 않습니다. 이혼 후 쓸쓸해하시던 아빠 옆에 있어준 것, 고3 스트레스로 힘들어하는 절 살뜰하게 뒷바라지 해주는 것, 모두 고맙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엄마’라고 부르긴 싫어요. 전 절 낳아 준 우리 엄마를 ‘엄마’로 생각하니까요. 아빠와는 멀어졌지만 전 여전히 엄마와 수시로 통화하고 매달 얼굴도 보는 걸요. 어떻게 우리 엄마를 두고 또 다른 사람을 엄마라고 부르라는 건가요.

아빠는 “아빠가 선택한 사람을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 건 새 엄마 뿐 아니라 나까지 무시하는 행동”이라며 화를 내시는데 너무 힘들어요. 처음에는 ‘아줌마’라고 불렀는데 이젠 아빠 눈치를 보느라 말도 안 하게 되고 호칭도 얼버무리는 상황입니다.



10만6000쌍. 지난해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은 한국의 부부 숫자다. 같은 기간 남자 4만2000명, 여자 4만7000명이 재혼했다. 30년 전인 1987년에 비하면 이혼 건수는 두 배 이상 늘었고, 재혼 남녀도 71% 많아졌다. 과거와 달리 이제 이혼과 재혼은 흔한 일이 됐다.

특히 재혼 연령대가 20~30대에서 40~50대로 높아지면서 미성년 자녀를 둔 재혼가정이 많아졌다. 하지만 가부장적 유교 문화에 뿌리를 둔 ‘정상적인 가정’에 대한 사회적 관념이 여전해 이들의 자녀들은 종종 난처한 갈등상황을 겪는다.

당장 계부모(繼父母)에 대한 호칭부터 스트레스다. 고등학생 때 어머니가 재혼한 김민진 씨(가명·20·여)는 그 때의 경험이 아직도 상처로 남아있다. “엄마는 물론이고 친구들까지 ‘왜 아저씨라고 부르냐, 아빠라고 해야지’라며 타박했어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냐’ ‘아빠 기분은 생각 안하냐’면서요. 제 감정은 안중에 없었죠.” 김 씨는 “드라마를 보면 ‘드디어 나를 아빠(엄마)라고 불러줬다’며 감격스러워하는 계부모의 모습이 나오는데 그렇게 해야만 ‘정상적인 가정’이 된다고 여기는 인식이 문제”라고 말했다.

중학생 이창호 군(가명·14)은 학교에서도 호칭 딜레마를 겪었다. 가족과 함께 한 체험활동 기록지를 본 담임교사가 이 군을 불러 “왜 새 엄마를 아줌마라고 적었니? 혹시 사이가 안 좋니?”라고 물은 것. “사이는 좋은데 제 엄마는 아니라서요”라고 대답한 그에게 담임은 조심스럽게 “엄마라고 부르면 더 좋아하실거야”라고 조언했다. 김도경 미혼모협회 대표는 “사회적 시스템이 재혼 가정이나 편부모 가정 등 다양한 가족 형태를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부모 호칭에 대해서도 ‘사회적 강요’가 생긴다”고 해석했다.

아빠나 엄마가 새로 선택한 배우자를 아이에게 부모로 인정할 것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친엄마·친아빠와의 관계 설정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많다. 서모 군(15)은 초등학교 3학년 때 계모와 살면서부터 우울증이 생겼다. 계모가 괴롭혀서는 아니었다. 그는 상담전문기관을 통해 “처음엔 아빠 친구라고 소개했는데 어느 순간 진짜 엄마 대신 ‘엄마 역할’을 해줄 사람이라고 했다. 엄마라고 부르는 건 물론이고, 그런 생각만으로도 진짜 엄마한테 너무 미안하고 슬펐다”고 털어놨다.

재혼가정 자녀들을 심층 인터뷰한 김연진 목포과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아이들이 계부모를 엄마, 아빠라고 부르기 싫어하는 이유는 매우 다양하다”며 “친부모에 대한 미안함, 반대로 자신을 떠난 친부모에 대한 악감정 등 여러 복합적인 감정을 잘 들여다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재혼이 점점 늘어날수록 계부모 ‘호칭’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일반적으로 계부모를 엄마, 아빠라고 부르지 않는 영어권처럼 계부모를 ‘친부모의 새 배우자’로 여기고 다른 호칭을 써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안희란 부경대 공공정책연구소 연구원은 “중요한 건 호칭보다 계부모와 자녀 간의 유대”라며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호칭을 강요하는 것은 자녀의 반감을 키우고 가정불화의 원인이 된다”고 지적했다.

엄마가 재혼한 이유경 씨(가명·20·여) 가족은 ‘아저씨’라는 호칭을 자연스레 받아들인 사례다. 이 씨는 “중학생 때부터 ‘아저씨’와 함께 살았지만 한번도 아빠라는 호칭을 강요받은 적이 없다”며 “오히려 아저씨는 아빠를 만나러 갈 때마다 용돈을 쥐어준다. 엄마의 새 남편인 ‘아저씨’를 내 가족으로 여기고 존경한다”고 말했다.

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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