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된 애니메이션, 미술관을 차지하다

정양환 기자

입력 2018-05-24 03:00 수정 2018-05-2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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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민미술관 ‘애니메이션의 혁명’
8월 12일까지 특별 기획전


2002년 제26회 프랑스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장편 경쟁 부문에서 그랑프리를 받았던 ‘마리 이야기’를 연출한 이성강 감독의 단편 ‘오늘이’. 제주도 원천강본풀이라는 설화를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일민미술관 제공
‘애니메이션, 파인아트(fine art·순수미술)의 무대에 오르다.’

실은, 젠체하는 선긋기와 상관없이 애니메이션은 이미 ‘차고 넘치게’ 훌륭한 예술이다. 일민미술관이 “애니메이션 장르의 예술적 확장 가능성을 모색하는” 전시를 기획한다 했을 때 별로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예술은 굳이 따로 멍석을 깔 필요가 없다. 미술관에 가야 퀄리티가 올라가는 건 결코 아니니까.

하지만 18일 시작한 일민미술관의 기획전 ‘플립북(Flip Book): 21세기 애니메이션의 혁명’을 직접 관람해 보니 편견은 오히려 반대로 작용했음을 깨닫는다. 정형화할 필요가 없는 공간은 미술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디서건 그 ‘앙꼬’(혹은 정수)만 만끽하면 되는 것을…. 애니메이션이란 작품 자체는 물론이고, 그 이면의 스토리까지 담아냈기에 이 전시는 매우 흥미진진하다.

미술관에서 “본편”이라 부르는 ‘동화제작소’부터 살펴보자. 여기서 동화(動(화,획))란 말 그대로 ‘움직임을 표현한 그림’이다. 이런 과정에 필요한 스케치와 콘티 북, 스토리보드 등이 작품과 함께 전시된다.

일단 출품작들이 쟁쟁하다. 2011년 프랑스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받았던 ‘나의 저승길 이야기’로 유명한 루마니아의 안카 다미안과 지난해 부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도 화제를 모았던 ‘1917, 붉은 시월’을 연출한 카트린 로테 등 최근 해외에서 눈부신 명성을 쌓아가는 감독들의 작품이 포진했다. 한국의 이성강 오성윤, 일본의 아라이 후유와 사와코 가부키도 요즘 ‘힙한’ 작가들. 개막 전날인 17일 만난 로테 감독은 “애니메이션 역시 세상을 담고 드러내는 표현 수단”이라며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뜻에서 이번 전시에 참여하게 된 것을 뜻깊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노상호의 ‘Mobilis in Mobile’(90×82×30cm)은 ‘해저 2만 리’의 관련 이미지들을 재해석한 그림이다. 일민미술관 제공
재밌는 건, “번외편”이라 부르지만 ‘#해저여행기담_상태 업데이트’도 본편 못지않게 인상 깊다. 조주현 일민미술관 학예실장에 따르면 우리 땅에 처음으로 소개된 SF소설은 쥘 베른의 19세기 고전 ‘해저 2만 리’다. 1907년 일본에서 유학하던 한국 학생들이 이를 ‘해저여행기담(海底旅行奇談)’이란 이름으로 번역해 ‘태극학보’에 그해 3월부터 1908년 5월까지 연재했다. 이 작품은 원본에 충실하기보단 조국의 근대화에 기여하려는 계몽적 목적으로 상당 부분을 번안했다고 한다.

미술관은 예술가 8개 팀에 당시 중단됐던 연재의 ‘이어 쓰기 혹은 다시 쓰기’를 맡겼다. 회화와 설치미술, 애니메이션과 가상현실(VR) 등 다양한 방식으로 그 뒷이야기 혹은 전혀 새로운 스토리를 선보인다. 관객들이 박혜수 작가와 함께 직접 슬라이드 필름 위에 그림을 그려보는 하이브리드 참여형 프로그램도 있다. 아울러 미술관이 소장한 1883년판 ‘해저 2만 리’ 원본과 고려대 도서관이 소장한 1908년 ‘태극학보’ 원본도 함께 만날 수 있다.

8월 12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는 특별프로그램도 푸짐하다. 다음 달엔 아라이, 사와코 감독이 내한해 감독과의 대화 시간을 갖는다. 7, 8월엔 이성강 오성윤 감독도 참여한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와 한창완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 등의 강연도 있다. 자세한 일정은 미술관 홈페이지(ilmin.org)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02-2020-2083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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