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성지 경복궁에 한글 자취 전무… 세종대왕 노하실듯”

유원모 기자

입력 2018-05-15 03:00 수정 2018-05-1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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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타이포展’ 연 한재준 교수

11일 경복궁 내 옛 집현전 터인 수정전에서 만난 한재준 교수는 훈민정음에 대해 “세계적인 글자 디자인 매뉴얼”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훈민정음 서문에는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다르기 때문에 만들게 됐다’는 디자인 철학을 담았고, 이후 디자인 원리와 활용 방법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며 “575년이 지난 현대 디자인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매뉴얼”이라고 말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슈, 유_유.’

11일 찾은 서울 경복궁 경회루 맞은편 수정전 앞뜰. 귀여운 사슴의 모습을 닮기도 했고, 우뚝 선 사람의 형상을 표현한 듯한 빨간색 플라스틱 재질의 조형물 20여 개가 경복궁 잔디밭에 놓여 있었다. 가만 보니 한글의 자음과 모음만을 활용해 만든 독특한 조형물이었다.

이들은 ‘붉은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을 기념해 지난달 21일부터 이달 6일까지 열린 제4회 궁중문화축전의 ‘한글타이포전’에서 선보인 작품이다. 반응이 뜨거워 20일까지 전시 기간이 연장된 것. 이 작품을 만든 한재준 서울여대 시각디자인학과 교수(61)를 세종의 탄생일(15일)을 앞두고 한글이 태어난 집현전 옛 터(수정전)에서 만났다.

이 작품은 독특하게 한글 자모 중 ‘ㄱ, ㄷ, ㅇ, ㅏ, ㅡ, ㅣ’ 등 6개 글자만을 활용했다. ‘ㄱ’을 45도 돌려 ‘ㅅ’을 만들고, ‘ㄱ’과‘ㄷ’을 합쳐 ‘ㄹ’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세종의 한글 창제 원리인 ‘최소주의’ 원칙을 철저히 따랐다는 것이 한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자수간요 전환무궁(字雖簡要 轉換無窮)’ 즉, 글자가 간단하지만 요점을 갖추어 전환이 무궁한 확장성을 가졌다는 한글의 미학이 담겨 있다”며 “12개 형태로 변신이 가능한 ‘슈’라는 조형물을 통해 ‘널리 소통한다’는 세종의 뜻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글이 창제된 곳에서 전시가 진행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더욱 각별하다. 현재 수정전 자리는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 없어지기 전까지 조선 인문·학술의 본거지였던 집현전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인근 경회루에서는 세종이 직접 주재한 경연이 이어졌고, 경복궁의 서쪽 문인 영추문 건너편(현 통의동 일원)은 세종이 태어난 곳이다. 한 교수는 “영추문에서 수정전으로 이어지는 경복궁 일대는 한글의 성지라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로 역사적인 장소가 밀집한 곳”이라며 “경복궁에 한글의 역사성을 알려주는 표시나 시설이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은 너무나 아쉽다”고 지적했다.

한 교수의 한글 사랑은 유별나다. 한글문화원장과 공안과병원장을 지낸 공병우 선생(1906∼1995)과 공동으로 1990년 3벌식 한글 서체인 ‘공한체’를 개발했다. 서로의 성을 따 이름 붙인 공한체는 2000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우수한글꼴’에 선정되며 실용성과 조형미를 인정받았다. 이후 한 교수는 2008년 수정전에서 열린 특별전 ‘한글, 스승’의 총감독으로 활동하는 등 한글 디자인 보급을 주도했다.

그는 시각디자이너로서 한글 연구의 현실에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현행 국어정책이 지나치게 언어학적인 접근을 강조해 문법 위주의 정책만 다룬다는 지적이다. 한 교수는 “오히려 구글을 비롯한 해외 정보기술(IT) 업체들이 아름다운 한글 폰트를 개발해 무료로 나눠주는 데 앞장서고 있다”며 “디자인 등 문자 그 자체로 한글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범정부적인 한글정책 부서가 출범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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