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직한 야크처럼… 글로벌 1위 오를 것”
손가인 기자 , 박은서 기자
입력 2018-03-21 03:00 수정 2018-03-21 03:00
강태선 블랙야크 회장
기자와 인사를 나눈 강태선 블랙야크 회장(69)이 인터뷰 사진을 찍기 직전 이렇게 말한 뒤 양복을 벗고 빨간 아웃도어 점퍼를 입었다. 가슴팍에는 강 회장이 직접 디자인한 야크의 뿔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아무리 험준한 산도 거침없이 오르는 야크의 기운을 담자는 게 이 디자인의 정신입니다.”
서울 종로5가의 쪽방에서 등산용품 업체인 ‘동진사’로 시작한 블랙야크가 올해로 45주년을 맞았다. 탄탄한 다리로 우직하게 걷는 야크처럼 45년을 걸어온 강 회장을 20일 서울 서초구 블랙야크 본사에서 만났다.
○ 종로 쪽방에서 시작한 사업
강 회장의 고향은 제주도다. 섬 자체가 거대한 산인 제주 출신이어서인지 어려서부터 산이 좋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2년 정도 일을 하다가 서울에 올라온 것도 ‘서울의 산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처음 서울에 와서는 남대문시장에서 옷장사를 하던 이모를 도왔다. 강 회장은 일하는 틈틈이 남대문시장을 돌며 등산 장비를 유심히 봤다. 당시 등산용품은 죄다 미군 물품을 개조해 만든 열악한 것들이었다. 배낭은 한국인 체형에 맞지 않아 잠시만 메도 등이 아팠다.
그는 군 장비 배낭을 뜯어 본을 뜬 후 직접 수선해 메고 다녔다. 그 배낭을 본 주변 사람들이 ‘그 배낭 예쁘다. 나도 사 달라’고 부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두 번 배낭을 만들어 판 것이 사업가로서의 첫걸음이 됐다.
1973년 서울 종로5가에 24세 청년인 강 회장은 동진사를 세우고 400∼500원짜리 배낭을 본격적으로 팔기 시작했다. 제품은 입소문을 탔고 당시 브랜드인 ‘자이언트 배낭’은 큰 성공을 거뒀다. 1980년대 중반 3저(저유가, 저달러, 저금리) 호황 시기에 사업은 더욱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는 “그야말로 아침에 눈 뜨는 게 행복한 나날이었다”고 말했다.
○ 벼랑 끝에서 만난 ‘블랙야크’
크게 오르면 내리막도 가파르다. 1992년 3월 전국 국립공원과 주요 산에서의 야영·취사를 금지하는 법이 발표되면서 강 회장은 위기를 맞았다. 당시 아웃도어 시장의 90%는 버너 등 등산용품이었는데 수요가 뚝 끊겼다. 등산 장비업체 10곳 중 8곳가량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벼랑 끝에 몰리자 강 회장은 히말라야를 찾기로 했다. 초심으로 돌아가 돌파구를 찾기 위해 모임을 꾸렸고 산악인 엄홍길 대장도 등반에 동참했다. 당시 티베트에는 히말라야 등반인들의 짐을 운반해주는 포터가 없었다. 그 대신 새까만 털에 이마에 하얀 점이 있는 야크가 짐을 지고 산을 올랐다.
강 회장은 “자갈로 덮인 비탈길을 거침없이 오르는 야크를 보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당시 대자연의 품에서 등산용품만 아니라 의류까지 취급하는 폭 넓은 브랜드로 새출발을 하겠다고 의지를 다졌다”고 말했다. 지금의 ‘블랙야크’는 그렇게 탄생했다.
현재 블랙야크는 국내 시장을 넘어 유럽, 미국, 캐나다 등 22개국에 진출해 있다. 1998년 중국에 진출하며 처음 해외시장에 발을 내디딘 뒤 2012년에는 유럽의 세계 최대 아웃도어 박람회인 ‘이스포(ISPO)’에 참가하기도 했다. 블랙야크는 ISPO에서 총 19개의 상을 수상하며 뛰어난 품질을 인정받았다. 2016, 2017년에는 2년 연속 해외 매출이 40%씩 늘기도 했다.
한국의 아웃도어 업체들은 최근 수입 브랜드와 경쟁이 심해지면서 성장률이 정체된 데 따른 고민이 심하다. 하지만 강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사는 것 자체가 위기다. 기업은 365일 매일이 위기다. 그래서 지금이 과거보다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위기를 극복하는 건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준비다. 우리는 에베레스트 같은 곳에 직접 가서 목숨을 걸고 제품을 테스트한다. 이 때문에 품질은 자신 있고, 이런 점을 소비자도 알아주리라 생각한다.”
○ 2020년 글로벌 넘버원 브랜드로
강 회장은 사회 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1억 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에 아내와 함께 가입했다. 사회복지 법인인 강태선나눔재단을 통해 국내외 소외계층 지원사업도 하고 있다. ‘마음의 고향’ 히말라야에도 학교를 지어 네팔 지진으로 고통받고 있는 아이들을 돕고 있다.
강 회장은 최근 블랙야크 창립 45주년을 맞아 ‘2020년 글로벌 톱 브랜드’라는 비전을 발표했다. 창립 40주년이던 2013년에는 2020년까지 국내 2조 원, 해외 2조 원, 총 4조 원의 매출을 올리겠다는 청사진을 내놓기도 했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블랙야크의 신제품을 입고 틈날 때마다 산을 오른다는 강 회장은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블랙야크라는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 제1의 목표”라고 답했다. 강 회장의 사무실에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고사성어인 ‘호시우행(虎視牛行)’이란 현판이 걸려 있었다. 그는 “호랑이처럼 예리한 시각을 유지한 채 소처럼 끈기 있게 간다는 뜻”이라며 “블랙야크가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가 되는 날까지 우직하게 걸어가겠다”고 말했다.
손가인 gain@donga.com·박은서 기자
창립 45주년을 맞은 블랙야크의 강태선 회장은 20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블랙야크를 한번 사 입고 싶은 옷을 만드는 회사로
더욱 발전시키겠다”며 호랑이처럼 예리한 시각을 유지한 채 소처럼 끈기 있게 간다는 뜻의 고사성어 ‘호시우행(虎視牛行)’을
강조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잠시만 실례해도 되겠습니까?”기자와 인사를 나눈 강태선 블랙야크 회장(69)이 인터뷰 사진을 찍기 직전 이렇게 말한 뒤 양복을 벗고 빨간 아웃도어 점퍼를 입었다. 가슴팍에는 강 회장이 직접 디자인한 야크의 뿔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아무리 험준한 산도 거침없이 오르는 야크의 기운을 담자는 게 이 디자인의 정신입니다.”
서울 종로5가의 쪽방에서 등산용품 업체인 ‘동진사’로 시작한 블랙야크가 올해로 45주년을 맞았다. 탄탄한 다리로 우직하게 걷는 야크처럼 45년을 걸어온 강 회장을 20일 서울 서초구 블랙야크 본사에서 만났다.
○ 종로 쪽방에서 시작한 사업
강 회장의 고향은 제주도다. 섬 자체가 거대한 산인 제주 출신이어서인지 어려서부터 산이 좋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2년 정도 일을 하다가 서울에 올라온 것도 ‘서울의 산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처음 서울에 와서는 남대문시장에서 옷장사를 하던 이모를 도왔다. 강 회장은 일하는 틈틈이 남대문시장을 돌며 등산 장비를 유심히 봤다. 당시 등산용품은 죄다 미군 물품을 개조해 만든 열악한 것들이었다. 배낭은 한국인 체형에 맞지 않아 잠시만 메도 등이 아팠다.
그는 군 장비 배낭을 뜯어 본을 뜬 후 직접 수선해 메고 다녔다. 그 배낭을 본 주변 사람들이 ‘그 배낭 예쁘다. 나도 사 달라’고 부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두 번 배낭을 만들어 판 것이 사업가로서의 첫걸음이 됐다.
1973년 서울 종로5가에 24세 청년인 강 회장은 동진사를 세우고 400∼500원짜리 배낭을 본격적으로 팔기 시작했다. 제품은 입소문을 탔고 당시 브랜드인 ‘자이언트 배낭’은 큰 성공을 거뒀다. 1980년대 중반 3저(저유가, 저달러, 저금리) 호황 시기에 사업은 더욱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는 “그야말로 아침에 눈 뜨는 게 행복한 나날이었다”고 말했다.
○ 벼랑 끝에서 만난 ‘블랙야크’
크게 오르면 내리막도 가파르다. 1992년 3월 전국 국립공원과 주요 산에서의 야영·취사를 금지하는 법이 발표되면서 강 회장은 위기를 맞았다. 당시 아웃도어 시장의 90%는 버너 등 등산용품이었는데 수요가 뚝 끊겼다. 등산 장비업체 10곳 중 8곳가량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벼랑 끝에 몰리자 강 회장은 히말라야를 찾기로 했다. 초심으로 돌아가 돌파구를 찾기 위해 모임을 꾸렸고 산악인 엄홍길 대장도 등반에 동참했다. 당시 티베트에는 히말라야 등반인들의 짐을 운반해주는 포터가 없었다. 그 대신 새까만 털에 이마에 하얀 점이 있는 야크가 짐을 지고 산을 올랐다.
강 회장은 “자갈로 덮인 비탈길을 거침없이 오르는 야크를 보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당시 대자연의 품에서 등산용품만 아니라 의류까지 취급하는 폭 넓은 브랜드로 새출발을 하겠다고 의지를 다졌다”고 말했다. 지금의 ‘블랙야크’는 그렇게 탄생했다.
현재 블랙야크는 국내 시장을 넘어 유럽, 미국, 캐나다 등 22개국에 진출해 있다. 1998년 중국에 진출하며 처음 해외시장에 발을 내디딘 뒤 2012년에는 유럽의 세계 최대 아웃도어 박람회인 ‘이스포(ISPO)’에 참가하기도 했다. 블랙야크는 ISPO에서 총 19개의 상을 수상하며 뛰어난 품질을 인정받았다. 2016, 2017년에는 2년 연속 해외 매출이 40%씩 늘기도 했다.
한국의 아웃도어 업체들은 최근 수입 브랜드와 경쟁이 심해지면서 성장률이 정체된 데 따른 고민이 심하다. 하지만 강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사는 것 자체가 위기다. 기업은 365일 매일이 위기다. 그래서 지금이 과거보다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위기를 극복하는 건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준비다. 우리는 에베레스트 같은 곳에 직접 가서 목숨을 걸고 제품을 테스트한다. 이 때문에 품질은 자신 있고, 이런 점을 소비자도 알아주리라 생각한다.”
○ 2020년 글로벌 넘버원 브랜드로
강 회장은 사회 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1억 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에 아내와 함께 가입했다. 사회복지 법인인 강태선나눔재단을 통해 국내외 소외계층 지원사업도 하고 있다. ‘마음의 고향’ 히말라야에도 학교를 지어 네팔 지진으로 고통받고 있는 아이들을 돕고 있다.
강 회장은 최근 블랙야크 창립 45주년을 맞아 ‘2020년 글로벌 톱 브랜드’라는 비전을 발표했다. 창립 40주년이던 2013년에는 2020년까지 국내 2조 원, 해외 2조 원, 총 4조 원의 매출을 올리겠다는 청사진을 내놓기도 했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블랙야크의 신제품을 입고 틈날 때마다 산을 오른다는 강 회장은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블랙야크라는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 제1의 목표”라고 답했다. 강 회장의 사무실에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고사성어인 ‘호시우행(虎視牛行)’이란 현판이 걸려 있었다. 그는 “호랑이처럼 예리한 시각을 유지한 채 소처럼 끈기 있게 간다는 뜻”이라며 “블랙야크가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가 되는 날까지 우직하게 걸어가겠다”고 말했다.
손가인 gain@donga.com·박은서 기자
비즈N 탑기사
- 백일 아기 비행기 좌석 테이블에 재워…“꿀팁” vs “위험”
- 최저임금 2만원 넘자 나타난 현상…‘원격 알바’ 등장
- “배우자에게 돈 보냈어요” 중고거래로 명품백 먹튀한 40대 벌금형
- 이렇게 63억 건물주 됐나…김지원, 명품 아닌 ‘꾀죄죄한’ 에코백 들어
- 상하이 100년간 3m 침식, 中도시 절반이 가라앉고 있다
- 김지훈, 할리우드 진출한다…아마존 ‘버터플라이’ 주연 합류
- “도박자금 마련하려고”…시험장 화장실서 답안 건넨 전직 토익 강사
- 몸 속에 거즈 5개월 방치…괄약근 수술 의사 입건
- 일본 여행시 섭취 주의…이 제품 먹고 26명 입원
- “1인 안 받는 이유 있었네”…식탁 위 2만원 놓고 간 손님 ‘훈훈’
- 1인 가구 공공임대 ‘면적 축소’ 논란…국토부 “면적 기준 폐지 등 전면 재검토”
- 삼성, 세계 첫 ‘올인원 AI PC’ 공개
- “인구감소로 집값 떨어져 노후 대비에 악영향 줄수도”
- [머니 컨설팅]사적연금 받을 때 세금 유불리 따져봐야
- “만원으로 밥 먹기 어렵다”…평균 점심값 1만원 첫 돌파
- 고금리-경기침체에… 개인회생 두달새 2만2167건 역대 최다
- “한국판 마리나베이샌즈 막는 킬러규제 없애달라”
- 직장인 1000만명 이달 월급 확 준다…건보료 ‘20만원 폭탄’
- 엘리베이터 호출서 수령자 인식까지… ‘배송 로봇’ 경쟁 본격화
- 연체 채권 쌓인 저축銀, 영업 축소… 수신잔액 26개월만에 최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