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1.8% 참여 존엄사법 시행 첫날 “절차 너무 복잡” 가족도 의사도 혼란

조건희기자

입력 2018-02-05 03:00 수정 2018-02-0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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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서울의 한 대학병원 중환자실 앞에서 만난 A 씨는 망연한 표정이었다. A 씨의 남편(49)은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 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전날 밤 호흡이 가빠져 인공호흡기를 달았다. 의사는 환자가 회복할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다. A 씨는 남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인공호흡기를 뗀다는 ‘소생술 포기서(DNR)’에 서명하기로 했다.

하지만 A 씨가 마음을 정하는 사이에 시곗바늘이 4일 0시를 가리켰다. 이날부터 연명의료 포기 절차를 규정한 ‘연명의료결정법’이 전면 시행됐다. 새 법에 따라 DNR는 법적 효력이 없다. 연명의료를 중단하려면 환자 본인의 뜻을 증명할 서류를 내거나 환자의 직계 존비속 및 배우자 전원이 동의해야 한다.

A 씨는 다른 가족들이 지방에서 올라오는 동안 남편이 진정제에 취한 채 가래를 토해내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A 씨는 “남편이 직접 얘기한 적은 없지만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심전심으로 알고 있다”며 “그런데도 연명의료 중단 절차가 너무 복잡하다”고 말했다.

이날 의료 현장 곳곳에선 A 씨처럼 불편과 혼란을 겪는 사례가 속출했다. 시행일이 하필이면 주말인 탓에 가족관계증명서 등 연명의료 포기를 위한 서류를 발급받기가 쉽지 않았다. 연명의료 중단 절차를 제대로 숙지한 의료진도 많지 않았다.

암 환자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이날 서울대병원 내과 중환자실의 환자 11명 중 3명은 암이나 만성 간경화, 만성 폐쇄성 호흡기 질환 등으로 연명의료를 받고 있었다. 파킨슨병이나 다발성 신경증 등으로 입원한 나머지 8명은 사실상 연명의료 중단 결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암이나 만성 간경화, 만성 호흡기 질환,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 등 4가지 질환 환자는 말기(수개월 내 사망 예상)일 때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해 자신의 뜻을 밝혀둘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질환의 환자는 임종기(사망에 임박)에만 계획서를 쓸 수 있다. 허대석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임종기 환자 대다수는 의식이 없어 계획서에 서명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실성 없는 조항”이라고 말했다.

연명의료 결정 제도에 참여한 병원이 극소수인 점도 문제다. 연명의료를 중단하려면 ‘의료기관윤리위원회’를 갖춘 병원의 의사가 임종기 판정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전체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 3324곳 중 윤리위를 설치한 병원은 59곳(1.8%)에 불과하다.

윤리위를 설치하지 않은 병원은 지역 거점 공공의료원에 설치될 공공윤리위원회를 이용할 수 있다. 또 다른 병원의 윤리위와 위탁 협약을 맺을 수 있지만 아직까지 이 같은 사례는 없다. 일부 대형병원을 제외한 의료 현장에선 환자가 연명의료 중단 결정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우려가 현실이 된 것이다. 결국 대다수 병원에선 법적 효력은 없지만 책임을 피하기 위해 종전처럼 DNR에 환자 가족의 서명을 받는 방식으로 연명의료를 중단할 것으로 보인다.

박미라 보건복지부 생명윤리정책과장은 “연명의료를 중단한 의사를 살인방조죄로 처벌했던 1997년 12월 보라매병원 사건 이후 21년 만에 시행된 법이라 초기 혼란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며 “제도 안착을 위해 홍보를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연명의료 결정 제도 참여 병원은 연명의료정보포털(www.lst.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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