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무의 오 나의 키친]<27>설국의 산처럼 무가 내린다

요나구니 스스무 일본 출신·‘오 키친’ 셰프

입력 2018-02-05 03:00 수정 2018-02-0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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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구니 스스무 일본 출신·‘오 키친’ 셰프
피라미드가 만들어지기 이전 고대 이집트 시대에도 먹었다고 알려진 무.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도 크고, 작고, 길고, 맛이 순한 여러 종류의 무가 존재했다고 전해진다.

무는 대체로 쉽게 자라며 3주면 수확이 가능한 종도 있다. 주로 샐러드에 많이 쓰이는 무는 특유의 향과 맛뿐 아니라 소화에 도움을 주고 유해한 박테리아의 번식을 막는 소중한 채소다.

우리 집 텃밭에서도 해마다 여러 가지 맛과 색, 크기를 고려해 무씨를 구입한 후 몇 주씩 사이를 두고 뿌려 거의 매일 수확해 먹을 수 있도록 관리하고 있다. 어쩌다 수확 시기를 넘길 때면 딱딱해지거나 속이 비고 스펀지처럼 되기도 한다. 그럴 때는 더 자라 꽃이 피고 씨가 여물 때까지 기다린다. 꽃과 씨방도 부드러울 때 잘라 먹으면 영양가 있고 아름다우며 맛있는 샐러드가 된다.

무가 특히 맛있는 늦가을부터 겨울 사이 아내는 무 요리를 자주한다. 가늘게 채쳐 얼음물에 넣어 두면 무가 가닥가닥 힘 있게 살아난다. 간단한 드레싱만 뿌려 먹어도 맛이 있다. 뭇국이나 무밥, 조림을 하고도 항상 반쯤은 남아도는 무를 무말랭이용, 국거리용 크기로 썰어 집 안 한구석에서 건조시켜 보관한 후 다시 무 철이 될 때까지 먹는다. 말리면 영양과 맛이 농축되어 국물 요리에 사용하면 더욱 깊은 맛이 난다.

어릴 적 프렌치 셰프에게 배운 숙취 요리가 있다. 무에 버터와 소금으로 간을 한 요리였다. 이를 보고 동서양이 다르지 않은 무 이용법에 놀랐던 적이 있다.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멕시코에 알려진 무는 종교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00년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멕시코 오악사카 지방의 빨간 무 축제는 매년 12월 23일 밤 열리는데 무로 마리아상 등 여러 형상을 조각한다. 멕시코를 대표하는 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작품 소재로도 등장한다.

중국을 시작으로 발전된 무 요리는 일본에서도 가장 근본이 되는 요리 재료로 약방의 감초처럼 쓰인다. 가장 유명한 무 요리인 다쿠안은 노란 무 절임으로 에도시대 정치, 경제 지도자들의 스승이었던 다쿠안 스님(1573∼1646)이 조리법을 개발했다. 기근에 시달렸던 많은 사람을 구한 중요한 음식이었다. 당시에는 요즘 흔히 보는 통통한 무가 없어 무를 여성의 희고 가는 어깨선에 비유한 문학작품들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통통한 무가 들어오면서 못생긴 다리를 ‘무다리’라고 표현하게 됐다. 연기를 잘 못하는 배우들의 진한 화장을 무에 비유하고 공연에 실망한 관객은 무 조각을 집어던지며 야유를 보낼 때 사용하기도 했다.

무의 윗부분, 잎이 달린 초록 부분은 달콤하기 때문에 생채로 좋고 중간 부분은 국물, 조림으로 적합하다. 특히 한국식 생선조림은 매콤한 맛과 달콤한 무의 조화가 환상적인 맛을 자아낸다. 조릴수록 진한 무 맛에 반해 밥 한 그릇이 부족할 지경이다.

가장 밝은 색을 띠는 무의 아랫부분은 맵고 깔끔한 맛이 있다. 갈아서 튀김을 하거나 메밀국수의 소스로 사용된다. 무의 잎사귀는 말려 된장국을 끓이는데 아키타현의 겨울 풍경 모습이다. 처마 밑에 무청을 엮어 매단 모습을 이제는 볼 수 없지만 한국에서는 김장철 시골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겨운 모습이다.

일본의 겨울 무 요리로 ‘진눈깨비’ 또는 ‘눈 구경 냄비’라는 요리가 있다. 국물 요리가 끓기 시작할 때 강판에 간 무를 넣으면 눈처럼 희게 퍼지며 익으면서 떠오른다. 마치 설국의 산을 내려다보는 듯한 아름다운 요리다.
 
요나구니 스스무 일본 출신·‘오 키친’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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