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中 소설 못 읽게한 정조… ‘벽치’의 긍정효과 몰랐다

노혜경 호서대 인문융합대학 교수

입력 2017-11-20 03:00 수정 2017-11-2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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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역사에서는 과거에 천대를 받다가 현대에 들어와서 존중을 받거나, 반대로 과거에 귀하게 여겨지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사례를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코카인은 오늘날 금기시되는 마약이다. 하지만 코카인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만병통치약으로 각광을 받았다. 서양에서 문화 황금기라고 불리는 르네상스 시대에 광대는 그림 속에 등장만 해도 불경죄로 처벌받을 정도의 천한 직업이었다. 그러나 요즘 연예인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21세기에도 이런 현상은 자주 목격된다. 이른바 ‘덕후’라고 불리는 마니아다. 덕후라는 말은 일본의 오타쿠라는 말을 번안해서 사용한 것인데, 본뜻은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무엇 하나에 빠져서 모든 것을 팽개치는 사람을 비하하는 말이었다.


○ 조선시대 오타쿠, ‘벽치(癖癡)’

사실 우리말에도 오타쿠에 해당하는 단어가 있었다. 소위 오타쿠 집단이 우리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때는 바로 조선시대 정조(1752∼1800년) 시기였다. 당시 마니아를 뜻하는 대표적인 말로 ‘완물상지(玩物喪志)’라는 표현이 있었다. 특정한 물건을 너무 좋아해서 정상적인 생활을 못 한다는 뜻이다. 정확히 오늘날의 덕후와 같은 의미다. 골동품이나 문방구, 그림, 도자기, 화병, 꽃, 소설 읽기 같은 것에 빠져서 과거 공부, 가사, 심지어는 부인과 자식에 대한 의무까지 포기하고 가산을 탕진하는 사람을 말했다.

마니아를 뜻하는 또 다른 말로 ‘벽치(癖癡)’라는 표현도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한 가지에 편협하게 빠진 바보들’을 비꼴 때 이 단어를 썼다. 그런데 정작 이 소리를 듣는 벽치들은 오히려 이런 표현을 영예로 알았다고 한다. 스스로에게 별명을 지어 붙인 벽치들도 있었다. 가령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덕무는 자신을 ‘책만 읽는 바보’라는 뜻으로 ‘간서치(看書癡)’라고 지칭했다.

당대 마니아들이 탐닉하는 대상도 무척 다양했다. 벼루, 종이, 붓, 먹 등의 문방구류는 기본이고 속담, 방언, 담배, 돌, 칼, 곤충, 채소, 조류, 벌레 등 천차만별이었다. 이것들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면서 제목에 ‘경전’이라고 붙였다. 녹색앵무새경(녹앵무경·綠鸚鵡經), 비둘기경전(발합경·발합經), 담배경전(연경·煙經) 등이 대표적 예다.


○ 문체반정 단행한 정조

정조 때 확대된 이런 현상, 즉 새로 탄생한 벽치들에 대해 정작 정조는 어떻게 평가했을까. 정조는 이들을 극도로 무시했다. 아니, 사회적으로 매우 위험한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중국 소설에 푹 빠져 그 문체를 쓰는 덕후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소설 나부랭이들이 경전을 해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단을 물리치고 정도(正道)를 넓히기 위해서는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 이런 폐단을 근본부터 뿌리 뽑으려면 애당초 잡서를 사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제일이다”라며 문체반정(文體反正·한문의 문장 체제를 정통 고문(古文)으로 바르게 회복하자는 주장)을 단행했을 정도다.

정조는 단지 중국 소설을 읽는다는 이유로 김조순과 이상황에게 벌을 내렸고 해당 소설을 몽땅 불태웠다. 과거 시험답안에 소설 문체를 인용한 사람들도 처벌했다. 특히 이옥은 잘못된 문체를 쓰는 ‘문제의 인물’로 공식 낙인이 찍혀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했을 정도다. ‘열하일기’를 쓴 연암 박지원조차 정조에게 ‘문체를 타락시킨 주범’으로 밉보여 반성문을 써야 했다. 또한 정조는 중국 소설뿐만 아니라 중국판 경서조차 사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보는 것은 물론이고 소지하지도 못하게 한 것이다.


○ 정조가 벽치를 싫어한 이유

무언가에 빠진 사람들은 그것에만 집중한다. 그러다 보면 보편적인 윤리나 가치관, 일반적인 생활방식과 멀어지게 된다. 이런 사람이 조직에 있으면 골치가 아프고 귀찮아지기 마련이다. 사람들과 불화를 일으키며 피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정조 역시 그랬다. 그는 벽치들이 식견이 좁고 상식이 부족하며 온갖 물품을 좋아하다 보니 적국인 청나라 물건까지 무턱대고 좋아한다며 비난했다.

그러나 벽치의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식견이 좁고 상식이 부족하다지만 원래 전문가란 상식이 넓은 사람이 아니라 좁고 깊은 사람인 경우가 많다. 21세기 현대에 덕후가 그 가치를 인정받는 이유도 바로 이런 전문성 때문이다.

정조는 벽치들이 적국인 청나라까지도 좋아한다고 비판했는데 이는 요즘 식으로 해석하면 라이벌 회사 제품을 좋아한 사례와 유사성을 갖는다. 현대 대부분의 기업들은 자사 제품을 경쟁사 제품과 비교해 본다. 이는 회사의 사운이 걸린 중대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회사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라이벌 회사 제품을 연구하는 사람과 경쟁사 제품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빠져드는 덕후가 상대 제품을 분석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어느 쪽이 더 낫다고 100% 단언할 수는 없지만 덕후의 한마디가 더 큰 가치를 가질 확률이 높다.


○ 미래를 기준으로 삼는 사고방식

정조 때 국화에 빠진 인물이 한 명 있었다. 그는 국화를 모으다 못해 국화를 그린 그림을 모으고, 시를 쓰고, 때때로 국화 감상회와 품평회도 열었다.

여기까지는 취미생활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국화를 접붙이고 종자 개량을 하며 재배법에 관한 책도 썼다. 하지만 아쉽게도 조선 사회에는 아직 꽃시장이 열리지 않았다. 요즘처럼 국화가 인기 있는 상품이었다면 그는 아마 위대한 선구자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를 너무 앞서 태어난 탓에 큰 빛을 보지 못했다. 비운의 국화 전문가처럼 18세기의 벽치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자신들도 그것을 알고 스스로를 바보, 광인이라고 부르며 자조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선 덕후들도 존중을 받고 있다. 시대가 바뀌며 덕후들이 그 진가를 펼칠 무대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덕후가 될 수는 없으며 그게 바람직하지도 않다. 하지만 어떤 한 분야에 누구보다 깊게 천착하는 덕후는 무시와 경멸의 대상이 아니라 포용과 존중의 대상이 돼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현재가 아닌 미래를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조직과 사회에 보다 크게 기여를 할 수 있는 영역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노혜경 호서대 인문융합대학 교수 hkroh6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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