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상훈]똥돼지와 꿀꿀이의 채용비리

이상훈 경제부 차장

입력 2017-11-06 03:00 수정 2017-11-0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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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경제부 차장
꽤 오래전 일이다. 연초 인사발령을 받아 당시 정부과천청사에 있던 한 경제부처 취재를 담당하게 됐다. 새 출입처를 맡을 때마다 늘 그랬듯 부임 인사차 부처 장관실을 찾았다. “장관님은 외출 중”이라는 비서의 말에 “그럼 명함이라도 놓고 가겠다”며 장관 집무실에 들어갔다. 책상 위엔 이력서가 몇 장 놓여 있었다. ‘○○공사’ ‘△△△진흥원’ 같은 흘림체 글씨가 연필로 쓰여 있었다.

“여기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돼요!”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비서는 소리를 지르며 헐레벌떡 들어와 기자를 내쫓았다. 제대로 된 후속 취재는 못 했지만 ‘공기업 가려면 장관 책상에 이력서 올릴 정도의 ‘빽’은 있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다.

2010년 이맘때 ‘똥돼지 신드롬’이라는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유행어가 등장했다.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딸 특혜 채용 논란이 번진 이후 부정한 방법으로 취업한 유력자 자녀를 똥돼지로 부른다는 인사 담당자들만의 암호가 세간에 오르내렸다. 힘과 위세에 눌려 어쩔 수 없이 받아줬지만 뒤에서는 경멸과 반감이 담긴 단어로 부르며 그들을 조롱했다.

요즘은 금융권을 중심으로 ‘꿀꿀이’라는 단어가 주로 쓰인다고 한다. 똥돼지라는 말이 당시 언론을 통해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린 뒤로 은어(隱語)로서의 가치가 사라지자 엇비슷한 용어로 대체된 것이다. 미국에서는 국회의원들이 정부에서 선심성 지역구 예산을 챙겨가는 것을 ‘꿀꿀이 여물통(포크배럴·pork barrel)’이라고 부른다는데, 한국에서는 예산은 물론 일자리까지 힘 있는 자들이 돼지처럼 식탐한다.

꿀꿀이 채용비리는 주로 은행, 공공기관 등에 많다. 이곳들을 보면 공통점을 하나 찾을 수 있다. 시장경제 체제의 기본 작동 원리인 경쟁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부가 법으로 높게 쳐준 울타리 안에서 독과점의 혜택을 만끽하는 조직들이다. 민간 경제의 작동 시스템과 거리가 멀다 보니 경쟁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뽑히고 승진해도 해당 조직의 성과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되레 이런 곳들은 꿀꿀이를 많이 받아줄수록 윗선에 잘 보일 수 있어 좋다고 한다. 공정이나 원칙을 내세우면 힘센 분들에게 밉보여 조직에 오히려 해가 되는 게 현실이란 얘기다.

은행장이 자진 사퇴할 정도로 채용비리 후폭풍이 거세지자 금융당국은 채용비리를 접수하는 온·오프라인 창구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공공기관 채용비리 전수조사에 나서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그러나 국민은 물론 직원들조차 코웃음을 친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빽으로’ 자녀를 은행에 취업시킨 뒤 “대를 이어 은행에 몸 바쳐 봉사하겠다는 충성심의 발로”라고 공개 석상에서 말했다고 한다. 생존 여부를 걸고 경쟁에 나서는 일반 기업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안하무인이다. 과거엔 ‘꿀꿀이들은 경쟁력이 떨어지니 알아서 도태될 것’이라는 평민들의 자기 위안이라도 있었지만 요즘은 상황이 다르다. 이들은 번듯한 기관에서 쌓은 경력을 토대로 경영전문대학원(MBA), 법학전문대학원 등에 진학해 더 높고 단단한 신분의 벽을 쌓는다.

채용비리를 발본색원할 근본 처방 중 하나는 금융권, 공공 부문 등의 독과점 밥그릇을 깨는 것이다. 치열하고 공정하게 경쟁하는 토대만 제대로 다져져도 꿀꿀이들이 설 자리는 저절로 사라진다. 여물통을 뒤져 봐야 먹을 게 없다는 걸 깨닫게 해야 하건만 정부는 공공 부문의 몸집을 부풀릴 궁리만 하며 거꾸로 가고 있다. 경쟁의 열외(列外)가 늘어날수록 부정부패가 싹틀 온상은 커지는 법이다. 똥돼지가 꿀꿀이로 달리 불릴 뿐이다.
 
이상훈 경제부 차장 janua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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