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이야기]밥 한 공기의 기후 딜레마

한빛나라 재단법인 기후변화센터 커뮤니케이션실장

입력 2017-10-28 03:00 수정 2017-10-2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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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빛나라 재단법인 기후변화센터 커뮤니케이션실장
알알이 꽉 찬 벼가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가을이다. 얼마 전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오는 길에 차창 밖으로 누렇게 물든 논을 보고 한 학생이 버스 운전사에게 “저게 뭐냐”고 묻는 걸 들었다. “뭐긴요, 벼잖아요.” “아, 저게 논이에요?” 멋쩍게 웃었지만 사실 도시에서 살면 눈앞에 벼를 두고도 벼인 줄 모른다. 벼를 식탁 위 뽀얀 쌀밥으로만 경험한 까닭이다.

경주 최부자 집은 1600년대 초반부터 300년간 만석꾼의 전통을 유지한 집안으로 유명하다. 알려진 바로는 최부자 집의 1년 쌀 생산량이 3000석이었다고 한다. 한 마지기의 논에서 쌀 한 석이 나온다고 보면 대략 60만 평 크기의 논을 경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올해 10a(아르)당 쌀 생산량이 524kg이니 요즘 같으면 최부자 집 논에서 쌀 7000석 이상을 생산할 수 있다. 그만큼 농업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러나 비약적인 농업생산성 증대로 최부자 집 부럽지 않은 만석꾼의 꿈을 실현한 후예들은 오늘 기후변화라는 인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인구 증가로 세계 쌀 수요는 늘어나는 데 반해 기후변화는 벼 재배 환경을 나날이 악화시킨다. 더욱 난감한 것은 쌀 생산량을 늘릴수록 벼 재배 과정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 양도 늘어나 결과적으로 인류를 먹여 살리려는 노력이 인류를 더 위험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농업생산성 증대의 이면에는 무분별한 화학비료와 화석에너지의 사용이 있다. 급격히 늘어난 질소계 화학비료는 대기 중 아산화질소의 농도를 높인다. 아산화질소는 이산화탄소보다 지구온난화 지수가 무려 310배나 높다. 2016년 국가 온실가스 인벤토리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농업 분야 온실가스 배출량은 2014년 기준으로 국가 전체 배출량의 3.1%를 차지한다. 이 중 벼 재배 분야는 농업 분야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

세계적인 농업연구기관인 국제미작연구소(IRRI·International Rice Research Institute)는 벼 재배 과정에서 나오는 온실가스인 메탄과 아산화질소를 줄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제시한다. 이 중에는 논에 물을 항상 채워두는 것이 아니라 며칠간 물을 뺀 후 다시 물을 대는 AWD 관개기술, 질소계 비료를 대체하는 작물양분관리법, 벼농사 부산물을 땅에 묻지 않고 바이오 숯으로 가공해 사용하는 바이오에너지화 기술 등이 있다.

우리나라도 ‘농림수산식품 분야 기후변화 대응 세부 추진계획’(2011∼2020년)을 수립해 놓고 있다. 농업 분야 온실가스 감축 방안으로 논물을 얕게 댄 뒤 마르면 다시 대는 ‘물 걸러대기’를 확대하고, 땅을 갈아엎지 않고 그대로 농사를 짓는 무경운 농법과 같은 저탄소 농법의 보급을 추진하고 있다.

인류는 약 1만 년 전부터 벼농사를 해왔지만 요즘처럼 딜레마에 빠진 적은 없었다. 기후·환경적 악조건 속에서 2050년이면 90억 명에 달하는 인류를 배불리 먹일 정도로 생산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기후변화에도 현명하게 대응할 방법은 무엇일까.

마을사람들이 나란히 손 모내기를 하고 새참 먹던 광경은 과거의 풍경이다. 드론이 하늘에서 특수처리한 씨를 뿌리고 컴퓨터가 공장에서 벼를 수경 재배하는 모습이 가까운 미래일지 모른다. 100년 뒤 최부자 집의 후예 앞에 놓일 밥 한 공기가 어떤 경로로 밥상에 오를지 자못 궁금하다.

한빛나라 재단법인 기후변화센터 커뮤니케이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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