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표의 근대를 걷는다]<67>옛 한국은행과 1만 원권 스캔들

이광표 오피니언팀장·문화유산학 박사

입력 2017-10-26 03:00 수정 2017-10-2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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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한국은행 본관(1912년·현 화폐박물관·위 사진)에 전시 중인 대통령 서명 1만 원권(1972년).
중세 유럽의 성채를 연상시키는 화려하면서 균형 잡힌 아름다움. 좌우 모퉁이에 망루처럼 돌출된 부분이 특히 인상적인 서울 중구 남대문로 옛 한국은행 본관. 1912년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 건물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은행(조선총독부 직속 금융기관) 건물로 사용했고, 광복 이후 1950년 6월부터 우리 한국은행 본관으로 사용했다. 6·25전쟁 때 폭격으로 내부가 불에 탄 뒤 1958년 1월 임시로 복구했고 1989년 5월 원형 복원해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으로 사용해 오고 있다.

많은 전시유물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특이한 내력의 1만 원권 한 장. 1972년 최고액권인 1만 원권을 처음 만들 때였다. 한국은행은 고심 끝에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재인 석굴암 본존불과 불국사의 모습을 앞뒷면에 디자인해 넣기로 결정했다. 이어 시쇄품(試刷品)을 만들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서명을 받아 발행 공고를 마쳤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기독교계에서 “불교 문화재인 석굴암과 불국사를 1만 원권에 표현하는 것은 특정 종교를 두둔하는 일”이라고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반발은 거셌다. 반대가 그치지 않자 한국은행은 결국 발행을 취소하고 말았다. 국내 최초의 1만 원권 발행은 이렇게 어이없이 무산돼 버렸다. 결국 이듬해 1973년 세종대왕 초상과 경복궁 근정전으로 도안을 바꿔 새로운 1만 원권을 만들었다. 종교적 논란이 없도록 이번엔 불교 문화재는 아예 제외했다. 난센스였지만 그때는 그랬다. 박 전 대통령의 서명이 들어가 있는 석굴암 1만 원권 시쇄품은 현재 화폐박물관 1층에 전시돼 있다.

2008년엔 이런 일도 있었다. 고액권 발행이 필요하다는 여론에 따라 5만 원권과 10만 원권을 발행하기로 하고 준비하던 때였다. 등장인물로 5만 원권엔 신사임당이, 10만 원권엔 백범 김구가 선정되었다. 그런데 10만 원권을 두고 논란이 일었다. 이념을 내세워 김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들의 조상을 10만 원권 인물로 채택해 달라는 주장이 쏟아져 나왔다. 고민하던 한국은행은 10만 원권 발행을 무기한 연기했다. 종교이기주의, 문중이기주의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광표 오피니언팀장·문화유산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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