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개 논제’ 새겨진 청동門… “믿음 태동한 성지” 세계인 북적

정양환 기자

입력 2017-10-16 03:00 수정 2017-10-23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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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루터의 도시를 가다]
<上> 비텐베르크-아이제나흐


독일 비텐베르크시청 광장에 있는 마르틴 루터 동상. 1821년 세워졌다. 같은 광장 옆엔 필리프 멜란히톤의 동상도 있다. 바로 인근엔 루터가 처음으로 독일어 설교를 했던 ‘성 마리아 시립 교회’도 있다. 비텐베르크=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1517년 10월 31일. 이달 31일은 개신교는 물론이고 세계 종교사(史)에서 손에 꼽을 만한 뜻깊은 날이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1483∼1546)가 로마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를 정면으로 반박한 ‘95개 논제’를 천명한 지 딱 500년이 되기 때문. 루터의 개혁은 “중세에서 근대로 나아가는, 종교를 넘어 사회와 세상을 뒤바꾼” (미국 종교학자 어윈 루처) 마중물로 평가받는다. 동아일보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루터의 자취가 가득한 독일의 4개 도시를 찾았다. 16세기 한 수도사의 외침은 500년이 지난 지금 21세기엔 어떤 울림으로 다가올까. 》
 

○ 비텐베르크-개혁의 물꼬가 터지다


지난달 26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새벽안개를 헤치고 약 460km를 달려 마주한 비텐베르크는 역시 루터의 도시였다. 원래 정식 지명도 ‘루터슈타트(Lutherstadt·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인 이곳은 평일 오전인데도 세계 곳곳에서 몰려든 이들로 북적였다.

미국의 성지순례 일행인 제니 리들리 씨(62)는 “평생의 믿음이 태동한 성지(holy land)를 드디어 찾아 너무 행복하다”며 “루터의 용기로 평신도도 하나님을 가까이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종교개혁이 오롯이 루터의 힘만으로 이뤄졌다고 보긴 힘들다. 체코 신학자 얀 후스(1369∼1415)를 비롯한 선대의 노력이 켜켜이 쌓여 루터에 이르렀다. 실제로 후스는 처형 직전 “거위(체코어로 ‘후스’)를 요리해도 100년 안에 백조가 일어나 승리한다”고 예언했다. 루터가 이곳 ‘성 교회’ 대문에 써 붙였던 95개 논제는 힘찬 백조의 날갯짓이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95개 논제를 써 붙였던 성교회의 대문. 1858년 청동 대문으로 바꾸며 논제 전문을 새겼다. 비텐베르크=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지금은 논제가 새겨진 청동 문으로 변한 교회 안엔 제단 앞에 루터의 묘도 있다. 평생의 협력자였던 필리프 멜란히톤(1497∼1560)과 함께. 멜란히톤은 종교개혁의 주요 핵심 인물이지만 온화한 성품 탓에 전면에 나서는 걸 꺼려했다. 두 사람은 당시 사제의 전유물이던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데 매진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묘지석엔 ‘마르틴 루터 여기 잠들다’가 라틴어로 쓰여 있다.

교회에서 걸어서 10여 분 거리인 박물관 ‘루터하우스’도 역시 방문객으로 북적였다. 당시 루터가 속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이 현대에 와서 바뀐 모습이다. 루터가 번역한 1534년 판본 독일어 성경과 초상화 등 귀중한 유물들을 만날 수 있다. 최근 박물관은 1525년 루터와 결혼한 카타리나 폰 보라(1499∼1552) 전시실을 따로 개장했다. 루터하우스 측은 “루터가 갖은 박해로 벌이가 시원찮을 때, 농장과 공방을 경영하며 남편을 뒷받침한 부인의 공이 컸다”고 설명했다.


○ 아이제나흐-잉크로 악마와 싸우다

다음 날 찾은 아이제나흐는 실은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든 뒤 1521년 10개월 정도밖에 머무르지 않았다. 당시 루터는 보름스 제국의회가 교황청에 항거한 그에게 추방령을 내려 도망자 신세였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루터는 이곳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최고의 역사적 업적을 남겼다. 그해 9월 완성해 ‘9월 성경’으로 불리는 독일어 신약성서를 완역한 것이다. 구텐베르크 인쇄술 덕에 전국으로 퍼진 성경은 종교개혁 확산의 결정적 도화선이었다.

평지에서 400m가량을 올라간 바위산 위에 세워진 성은 주위에 전시된 대포 탓인지 왠지 ‘요새’의 풍모를 지녔다. 자신을 고립시키는 세상을 향해 성서란 무기를 곧추세운 루터의 의지가 배었기 때문일까. 전시관 관계자는 “당시 루터는 책을 쓰다 악마를 마주해 잉크병을 던졌다고 전해진다”고 귀띔했다. 진짜 악마가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신앙심으로 무장한 펜 하나가 서슬 퍼런 제국의 총칼을 꺾는 순간이었다.
  

▼ “1년 내내 기념전-콘서트… 방문객 벌써 작년의 倍” ▼

“복잡할 것 없습니다. 루터의 가르침은 ‘오직 믿음으로’란 한마디로 모든 게 설명됩니다.”

지난달 26일 만난 독일 비텐베르크 루터하우스의 베냐민 하셀호른 총괄매니저(사진)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말투였다. 베를린 훔볼트대 신학박사인 그는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구원에 이른다는 혁명적 인식의 전환을 인류에게 선사했다”고 평가했다.

―루터의 주장은 지금도 유효한가.

“물론이다.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성경. 그때나 지금이나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나. 물론 세부적 가치나 해석은 세월이 흐르며 조금씩 바뀌었다. 그러나 루터는 신을 대신해 면죄부를 파는 교황청의 가치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신 앞에 선 한 인간이란 ‘단독자’ 개념을 세웠다. 이는 근대는 물론이고 현대 문명의 기반과도 직결된다. 개인의 탄생이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종교 인구는 줄어들고 있다.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비텐베르크에서도 전체 인구의 15% 정도만 교회에 다닐 정도다. 종교개혁 500년이 흐르며 개신교 역시 ‘고인 물’이 되진 않았는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때다. 하지만 루터가 신앙으로 역경을 이겨냈듯, 결국은 믿음만이 우리의 돌파구다. 이곳엔 한국인 순례자들이 끊이지 않는다. 루터의 영성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500주년을 맞은 현지 분위기는 어떤가.


“교회는 물론이고 정부도 적극적이다. 이곳을 비롯해 독일 곳곳에서 기념 전시와 콘서트가 1년 내내 이어지고 있다. 비텐베르크는 해마다 약 20만 명이 방문하는데, 올해는 벌써 두 배가량 찾아왔다. 다만 젊은층에서 관심이 높지 않은 건 이곳에서도 큰 고민거리다. 끊임없이 변화에 목마른 모습을 보여야 하는 이유다. 루터가 현재에 안주했다면 개혁이 가당하기나 했겠나.”
  
비텐베르크·아이제나흐=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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