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건혁]‘사우디 22조 원전’ 수주 걷어차려는 정부
이건혁기자
입력 2017-09-21 03:00 수정 2017-09-21 03:00
세종=이건혁·경제부
18일(현지 시간) 오스트리아 빈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2032년까지 원자력발전소 17기 건설 계획을 담은 국가 원자력에너지 프로젝트 설명회를 열었다. 이르면 10월 중 최소 200억 달러(약 22조 원)로 추정되는 원전 2기 건설 입찰공고를 앞둔 시점이었다. 전 세계 원자력계의 이목이 쏠렸다. 사우디는 2032년까지 18GW(기가와트) 규모의 원전 건설에 나설 예정이기 때문이다. 일단 일감을 한 번 따기만 하면 최소한 한 세대의 먹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 이런 중요한 자리에 사우디에서는 부총리급 인사이자 원전 프로젝트 책임자인 하심 야마니 원자력신재생에너지원(K.A.CARE) 원장이 참석했다. 사우디 왕가에서 에너지 정책에 대해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고, 에너지 정책에 대한 권한도 큰 인물로 알려졌다.
야마니 원장을 만나기 위해 원전 수출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는 서기관급 직원을 대표로 보냈다. 원전업계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반응이 나왔다.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출 당시 실무를 담당했던 한 인사는 “최소한 차관, 필요하면 국무총리라도 가서 만나야 할 인물”이라고 탄식했다. 그는 또 “이 정도면 상대국에 ‘한국은 원전 수주에 관심없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해외에서 한국은 갈수록 원전 포기 국가로 꼽힐 가능성이 높다. UAE에 수출한 원전(APR-1400)과 같은 신고리 5, 6호기의 공사가 취소될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탈원전과 원전 수출은 별개”라고 말한다.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자국에서 원전 사업을 포기하는 국가의 원전을 구입해 줄 나라는 없다. 한국전력공사가 인수를 추진 중인 영국 무어사이드 원전 프로젝트 역시 위태로운 상황이다.
경쟁국인 중국은 지난달 베이징에서 야마니 원장과 비공식 미팅을 가졌고, 이어 중국 상무부총리가 사우디 왕세자를 직접 만나 원전 수주전을 펼쳤다. 중국은 영국 무어사이드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 산업부는 “외교부 대사가 국가를 대표해 참석했기 때문에 충분히 수주 의지를 보였다. 양자 회담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이진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1차관이 설명회에 들어갔다”며 문제가 없다는 태도다. 중국이 현지에 대사가 없어서 상무부총리를 보냈을 리가 없다. 한국은 사우디에 2022년 가동을 목표로 한 한국산 소형 스마트원전(10만 kW) 2기를 건설 중이다. 이렇게 경쟁국보다 앞서 있는데도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고 있다.
이건혁 기자 g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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