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박민우]‘강간범과 결혼’ 악법 사라지는 중동

박민우 특파원

입력 2017-08-21 03:00 수정 2018-01-01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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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우 카이로 특파원
레바논 형법 522조. “만약 성폭행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유효한 결혼 계약이 성립되면 기소가 중지된다. 이미 판결이 났을 경우에는 처벌의 집행이 정지된다.”

자신을 강간한 범죄자와 결혼하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실제 중동의 많은 국가에선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 방식”이라며 피해자에게 강간범과 결혼할 것을 강요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모로코 소녀 아미나 필라리 양은 15세 때 길거리에서 납치돼 성폭행당했다. 하지만 부모와 법원 관계자는 강간범과 결혼할 것을 그녀에게 강요했다. 강제 결혼 후 5개월 동안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그녀는 결국 쥐약을 삼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형법 개정 운동이 거세게 일면서 2년 뒤인 2014년 모로코는 강간범 면책 조항을 폐지했다.

16일 레바논 의회도 일명 ‘강간범과 결혼하라’ 법으로 불리는 형법 522조를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시행된 지 거의 70년 만이었다. 이날 법안 폐지가 확정되자 레바논 여성 인권단체 아바드 설립자인 기다 아나니 씨는 “기존의 사고방식과 전통을 깨는 첫걸음”이라며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최근 중동에서는 유사한 법률 개정 움직임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레바논에 앞서 지난달 26일에는 튀니지가, 이달 1일에는 요르단이 강간범 면책 조항을 삭제했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관련 법 개정 요구에도 리비아, 바레인, 시리아, 알제리, 이라크, 쿠웨이트, 팔레스타인 등은 여전히 피해자와 결혼하는 강간범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다.

그간 중동 지역에서 피해자와 결혼하는 강간범에게 면죄부를 줘 왔던 건 ‘명예 살인’과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국제 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HRW)는 명예 살인을 “가족에게 불명예를 가져다줬다고 생각되는 여성을 남성 구성원들이 죽이는 행위”로 규정한다.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매년 5000명이 넘는 여성이 명예 살인으로 희생된다. 요르단에서는 1998년 형부에게 강간당해 경찰 조사를 받고 나온 여동생을 한 남성이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잔인하게도 그는 총으로 여동생의 머리를 겨냥해 총 4발을 쏘았다. 그러나 그가 받은 처벌은 고작 징역 6개월형에 불과했다.

지금도 요르단에서는 매년 20∼30건의 명예 살인이 발생한다. 요르단 최초의 여성 검시관인 이스라 타왈베 씨는 “피해자 입장에서는 가족에게 명예 살인을 당하는 것보다 강간범과의 결혼을 받아들이는 것이 낫다”며 “강간범 면책 조항이 우리 사회의 현실에 맞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르단 여성들은 살해 위협을 무릅쓰더라도 가족이 아닌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로 했다. 최근 강간범 면책 조항을 폐지한 요르단에서는 명예 살인을 정당화하는 근거 조항인 형법 340조 폐지 운동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여성의 운전을 금지하는 등 전 세계에서 여성의 인권이 가장 열악한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최근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사우디의 젊은 실세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여성의 사회 참여를 독려하면서 개혁적인 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4월 사우디가 유엔여성지위위원회(CSW)의 4년 임기 13개 위원국 가운데 하나로 처음 선출된 여파도 크다. “여성 차별 국가를 성 평등 위원회에 앉혔다”며 비판 여론을 가라앉히기 위해라도 눈에 보이는 변화가 필요했다.

사우디 국왕은 5월 여성이 공공 서비스를 이용할 때 남성 후견인의 동의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내용의 칙령을 발표했다. 사우디 여성들은 남성 후견인의 허락 없이는 일상적인 외출조차 할 수 없었다. 논란이 됐던 여성 운전 금지도 최근 국왕의 정책자문기구가 운전 허용 쪽으로 돌아섰다. 이와 함께 사우디 법무부는 이달 들어 △미성년자 결혼 승인 절차 강화 △이혼 여성 지원 △여성의 양육권 보호 △여성 법대 졸업생 지원 등 4개 법안을 잇따라 통과시켰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매년 발표하는 세계 성(性)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사우디의 성 격차 지수는 0.583으로 조사 대상 144개국 중 141위다. 레바논(135위)과 요르단(134위), 튀니지(126위)를 포함해 대부분의 중동 국가가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여성 인권을 유린해 온 악법이 폐지되고 수니파의 맹주인 사우디가 CSW 위원국이 되면서 중동에 변화의 바람이 불 것으로 전망된다.

박민우 카이로 특파원 min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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