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상훈]한없이 가벼운 ‘예산 구조조정’

동아일보

입력 2017-08-21 03:00 수정 2017-08-2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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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조정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몸집을 줄이고 때로는 생살을 도려내야 한다. 지난해 조선·해운 구조조정이 대표적이다. 2만여 명에 달하는 인력을 감축하는 과정에서 나라 전체가 휘청거렸다. 7조 원 넘는 국책은행 자금을 수혈했지만 힘들다는 비명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부실 대기업 몇 곳에 메스를 대는 것도 이렇게 고통이 큰데 하물며 나라살림 구조조정의 어려움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도로, 철도를 더 만들고 실업급여를 늘려 돈을 풀어야 하는 게 국가의 역할이다. 정권을 막론하고 여야를 떠나서 돈(세입)이 부족하면 빚(국채)을 늘려서라도 경제에 온기를 불어넣어 달라는 요구를 하기 일쑤다. 그래서 나라살림 씀씀이를 줄이는 것은 가계, 기업의 긴축과는 차원이 다른 저항과 어려움이 뒤따른다.

전년(前年)보다 지출을 줄이는 게 사전적 의미의 구조조정이라고 한다면 한국에서 예산 구조조정이 이뤄졌던 적은 1984년과 1998년 단 두 해뿐이다. 1984년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라며 신임하던 김재익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의 주도로 예산안을 짰던 시기다. 매년 늘어나는 나랏빚을 갚고 두 자릿수 소비자물가상승률을 억제하기 위해 예산 동결을 추진했다. 국방예산을 깎는다는 말에 군 장성이 예산실장 사무실에 쳐들어와 책상에 권총을 턱 올려놨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입길에 오르내린다. 외환위기를 겪었던 1998년은 국제통화기금(IMF)의 긴축 요구를 무조건 받아들여야 했던 때다. 결국 군부독재, 국가부도 위기 같은 비정상적 상황에서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정부와 국민의 독한 결기가 있어야 겨우 가능한 게 예산 구조조정이다.

그렇게 엄중한 예산 구조조정이라는 말이 요즘은 너무 쉽고 가볍게 쓰인다.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기자회견에서 “재정지출에 대대적으로 구조조정을 해 세출을 절감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 지 하루 만에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경상성장률에 턱없이 못 미쳤던 지난 정권의 재정지출 과오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며 씀씀이를 늘리라고 요구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재정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면서도 427조 원의 예산을 약속했다. 지출을 깎겠다는 대통령 앞에서 여당 원내대표가 ‘나랏돈을 더 쓰라’고 닦달하고, 부총리는 ‘그래도 줄이겠다’는 말이 무색하게 8년 만의 최대 지출 확대를 내세웠다.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된 설명으로 나라 살림에 대한 국민들의 의구심만 커지고 있다.

정부 여당의 사회간접자본(SOC) 예산 삭감 약속도 믿기 어렵다. 정부가 SOC를 줄인 예산안을 제출하면 연말 국회 심의에서 소리 없이 늘어났던 게 지난날 반복됐던 관행이다. 온갖 쪽지예산 청탁이 난무했고 이를 둘러싼 청와대-기획재정부와 정치권의 은밀한 거래가 이뤄졌다. 과거 정권의 사업예산이 적폐가 아니다. 힘 있는 여야 지도부 지역구 위주로 시혜를 베풀듯 증액을 허락한 정부, ‘예산이 다 그런 것’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국민 세금을 갈라 먹은 여야 정치권이 진짜 적폐다.

재량지출 삭감 같은 생색내기 푼돈 절감으로 기초연금, 아동수당 등 쏟아지는 조 단위의 복지 재원을 채울 수는 없다. 갈수록 커지는 복지지출에 대한 경고를 예산 구조조정이라는 그럴듯한 수사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것이야말로 증세 없는 복지에 실패한 박근혜 정부의 실책을 반복하는 것이다. 국민은 정부가 듣기 좋은 달콤한 말을 하길 원하지 않는다. 잇따르는 복지에 돈이 얼마나 들어갈지, 쪽지예산 같은 잘못된 관행을 어떻게 끊을지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과 약속을 원한다.

이 상 훈 경제부 차장 janua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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