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20代때 8년간 권투… 그 체력으로 주방서 버티죠”

김동욱 기자

입력 2017-08-14 03:00 수정 2017-08-1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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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식객’ 임지호 자연요리연구가
11세때 돈벌려고 日밀항 시도… 전국 돌며 허드렛일하다 요리 배워
시골 중국집-유명호텔 주방장 경험
靑초청 받은건 고정틀 탈피로 해석… 과거-현재 존중 담긴 음식 차려


가장 자신 있는 요리를 딱 하나만 꼽아 달라며 뜬금없지만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요리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없다”는 게 방랑식객으로 불리는 ‘고수’의 답이었다. 강화=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그의 손은 투박하고 거칠었다. 악수를 나누면서 그의 손이 제법 맵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방랑식객’으로 유명한 자연요리연구가 임지호 씨(61)는 인터뷰 중 묻지도 않은 권투 이야기를 대뜸 꺼냈다. “20대 때 8년간 권투를 했어요. 2대 독자라 집안에서 걱정할까 봐 시합에는 나가지 못했죠. 그때 체력으로 지금까지 주방에서 버티고 있어요. 하하.”

11일 인천 강화도에서 그가 운영하고 있는 식당에서 그를 만났다. 여전히 바쁘냐고 묻자 “항상 바쁘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원래 방송에도 출연하고 책도 낸 유명 요리연구가이지만 최근 그는 더욱 유명해졌다. 지난달 27, 28일 청와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기업인의 간담회에 초청받아 만찬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호텔이 아닌 저한테 요청이 오다니 파격적이죠. 고정된 틀을 벗어나겠다는 의지로 읽었어요. 메뉴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했어요. 첫째 날은 현재의 존중, 둘째 날은 과거의 존중이라는 의미를 담았어요. 대통령과 경제인 모두가 과거와 현재를 존중해 화합하면서 더 좋은 나라를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는 국민 한 사람으로서의 희망을 담았어요.”

기업인 간담회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음식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동아일보DB
청와대 초청까지 받은 그이지만 그가 걸어온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그는 11세 때 돈을 벌기 위해 일본 밀항을 시도하기도 했다. 부산과 전남 목포, 제주 등을 돌아다니며 먹고살기 위해 연탄 배달 등 허드렛일을 하다 요리를 배웠다. 시골 중국집부터 유명 호텔의 한식당 주방장까지 지냈다. 하지만 그는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자연요리를 연구했다. 어느새 그의 이름 앞에는 방랑식객이라는 수식어가 생겼다.

“방랑식객으로 불리지만 이제 돌아다니기보다는 새벽에 장을 보러 가는 것에 만족합니다. 여기 강화는 바다, 산, 들판에 산물이 풍부해요. 다양하고 새로운 재료가 많거든요. 요리사에게는 굉장히 이상적인 곳입니다.”

그의 식당에는 그가 그린 그림들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그는 국내외에서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열었을 정도로 미술에도 조예가 깊다. 그래서일까. 예술작품처럼 음식을 그릇에 내놓는다는 평가도 있다.

“제대로 배운 것은 없지만 제가 미적 감각을 타고난 것 같기는 해요. 예술 분야를 좋아하는데 원래 꿈도 뮤지컬 배우였어요. 노래와 연기를 배우려고 충무로를 들락날락했죠. 내 입으로 옮기기는 좀 그렇지만 저를 다룬 20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도 곧 나옵니다. 제가 직접 출연하고 내레이션도 했어요.(웃음)”

청와대 만찬 준비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요리 하나에도 의미와 철학을 담길 좋아했다. 이날 만남에서도 사회적 현상과 최근 요리문화에 대한 철학을 강조했다.

“전국을 떠돌던 10대 때 우연히 서점에 들렀다 철학책이 읽고 싶어 니체와 플라톤 같은 철학자들의 저서를 읽기 시작했어요. 조금이라도 돈 벌면 책을 샀죠. 어린 녀석이 무슨 어려운 책을 읽느냐고 비아냥거려도 꿋꿋이 읽었어요. 그때 읽은 책들 덕분에 음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웠죠.”

그는 음식뿐 아니라 외부에 비치는 모습의 한국적인 이미지에도 관심이 컸다. 만찬 당시 그는 닭 볏 모양의 모자와 무명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 작고한 김훈 디자이너가 2003년 유엔 한국 음식 페스티벌 참가 당시 그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것이다. “다들 닭 볏이라고 아는데 사실 경복궁의 근정전 처마와 기와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한국인의 기상을 세계에 알리자는 뜻을 담았죠. 자주 입다 보니 이제 너덜너덜해졌어요.”

이날 늦은 오후에 찾은 식당에는 점심시간에 손님들이 먹은 뒤 제대로 치우지 못한 식탁들이 많았다. 이들 식탁의 공통점은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들이었다.

방랑식객의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비결은 무엇일까? “재료, 재료 간의 조화, 솜씨 중 뭐냐”고 물었더니 그는 “요리사는 마음을 잘 키워야 한다. 바로 심성(心性)이다”라고 했다. 그의 요리 철학을 새삼 이 식탁들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전 누가 먹어 주고 좋아해 줘서가 아니라 요리하는 것 자체가 좋아요. 제가 행복해서 요리하니, 그 음식을 먹는 사람들도 어떻게 행복하지 않겠어요? 제가 행복을 담아 낸 접시가 빈 접시로 돌아올 때 정말 행복합니다.”
 
강화=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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