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선의 연극인 열전]번역·드라마투르그 김미혜 교수 “아직도 할 일이 참 많다”

심규선 기자

입력 2017-08-06 21:18 수정 2017-08-07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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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혜 교수는 한양대에서 정년퇴직을 한지 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번역하고, 책 쓰고, 사회활동을 하는데 분주하다. 헨리크 입센의 25개 전 작품을 번역해 몇 년 안에 전집을 내기 위해 피치를 올리고 있고, 내년에는 미국의 지역극장을 소개하는 책도 출판한다. 그는 교육, 연구, 번역, 저술, 잡지제작, 연극행정 등 다방면에서 일해 왔지만 요즘 하지 않는 게 하나 있다. 평론이다. 이유를 물었더니 “예전에는 평론도 많이 했다. 하지만 프로덕션에 참여해 직접 연극을 만들어보니 너무 힘들 게 만든다는 것을 알기에 난도질을 못 하겠더라”고 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그를 인터뷰하면서 그의 이름 앞에 어떤 타이틀을 붙여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그는 지금껏 내가 인터뷰한 극작가, 연출가, 배우, 무대디자이너(무대, 의상, 조명, 분장, 영상), 기획 등의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도 분명 ‘연극인’이다. 더욱이 ‘연극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은 반드시 한 사람 이상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내 취재 의도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인물이다.

그가 어려서부터 지금의 모습을 소망했던 것은 아니다. 그의 꿈은 지금과는 살짝 달랐다.

“중학교 때 꿈은 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대학신문기자로 일하면서 한때 신문기자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작가가 되길 원했다.”

그의 젊었을 적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연극인’으로서 후회 없는 시간을 보냈고, 지금도 그 길을 걷고 있다. 연극학 교수로서 연구와 교육을 하고, 연극 관련 학술서도 많이 저술했으며, 연극 대본도 여럿 번역해 무대에 올리고, 드라마투르그로서 제작에도 깊숙이 참여했다. 그는 누구인가. ‘한국 유일의 입센 전문가’로 불리는 김미혜 한양대 명예교수(69)다. 8월 4일 동아일보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연극인’으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이 인터뷰에서는 연극 제작에 직접 참여하는 번역가와 드라마투르그로서의 활동에 포커스를 맞추고자 한다(지금까지는 40,50대의 연극인을 주로 인터뷰했으나 번역과 드라마투르그는 연륜이 필요한 분야여서 김 교수를 인터뷰하게 됐다).

1. 먼 길을 돌아온 ‘연극인’이라는 자리

그의 어렸을 적 꿈이 연극이나 연극인과도 무연(無緣)은 아니다. 그래서 조금은 소개할 필요가 있다.

배우를 원했다는 것은 조금 의외다.

“막연히 원했던 게 아니다. 친구들을 모아놓고 얘기하면 친구들이 내 말에 완전히 빠져들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내게 배우 자질이 있나보다 하고 생각하게 됐고,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심각하게 배우를 꿈꿨다.”

그러나 부모님이 모두 최고 명문대를 나온 데다 본인도 공부를 꽤 잘하는 편이어서 차마 배우가 되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고 한다(그는 무학여중고를 나왔다). 그 시절은 연예인을 속칭 ‘딴따라’로 부르며 아래로 내려다보던 시절이었다(지금 연예인의 위상을 보면 세상, 참 많이 변했다. 나도 신문 기자 입사 때와 지금을 비교해 가장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농반진반으로 “입사할 때는 유명 연예인과 스포츠맨이 나를 찾아왔으나, 지금은 내가 그들을 찾아가도 만나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기자는 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고려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그는 문과대 수석이었다). ‘고대신문’의 선배들이 여러 번 권유하는 바람에 1학년 때 들었던 연극동아리 ‘고대극회’를 그만 두고, 2학년 때 고대신문사로 옮겼다. 문화를 담당했기 때문에 연극도 많이 보러 다녔다. 그러나 신문 만드는데 흠뻑 빠지는 바람에 세 과목이나 낙제를 했다. 그걸 아신 아버지가 ‘계속 신문사에 다니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해서 결국은 1년 만에 그만 뒀다. 대학 4학년 때 H일보 기자시험에 2차까지 붙었으나 그때도 아버지가 알고 심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꿈을 접었다. 고대신문을 인쇄하던 신아일보의 여기자들, 참 멋있었는데…”

작가는 또 어떤 연유로.

“대학 3학년 때 중앙일간지 신춘문예에 응모했는데 15명 안에 들어간 적이 있다.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공부할 때인 1981년, 예상치 않은 임신으로 큰 애와 9살 터울인 둘째 딸을 낳고 우울증에 걸린 적이 있었다. 어려운 살림살이에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지를 놓고 고민이 컸다. 그 때 틀어박혀 단편소설을 써서 C일보 신춘문예에 보냈는데 최종 2인까지 올라갔다. 그때 작가가 됐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배우, 기자, 작가를 꿈꿨던 시간은 그가 연극인의 길을 걷는데 자양분이 됐다. 그는 지금도 번역할 때 배우처럼 소리 내어 대사를 읽고, 제스처를 써 가면서 최적의 단어를 찾는다. 기자의 기질은 현장에 직접 가서, 취재를 해서 책을 내도록 등을 떠민다. 물론 작가를 꿈꾸며 습작을 했던 경험은 책을 쓰고 번역을 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작은 무역회사에 취직을 했으나 1년쯤 있다가 ‘작가가 되려면 글 쓸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마포고등학교 야간부 영어교사로 옮긴다. 그리고 고려대 독어독문학과를 나와 이 학교에서 독어교사로 재직하던 4년 선배를 만나 결혼한다. 그의 나이 24살이었고, 곧 큰 딸을 낳는다(그는 슬하에 자매를 두고 있다).

남편은 결혼 당시 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하면서 고려대와 서울산업대 등에서 강의를 했는데, 서른 살이 넘어서도 해외유학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오스트리아 국비장학생 시험에 합력해 1976년 빈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남편이 출국하기 전에 그는 서울시교육위원회(지금의 서울시교육청)의 영어교사 채용시험에 합격해 영등포여중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남편의 공부가 길어지자 1979년, 그도 오스트리아로 건너간다. 그것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빈 대학의 여름학기(서머스쿨)에서 독일어를 배웠다. 147개국 사람이 모였는데, 한국인은 나 혼자였다. 열심히 공부했고, 결과도 좋아서 수료할 때 빈 대학 총장상을 받았다. 그 상을 받고 나니 나도 여기서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해 9월에 연극학과의 박사코스에 등록했다. 1970년 대학을 졸업한 지 9년만이었다.”

시간의 갭도 있었지만, 연극애호가였을 뿐인 그에게 연극학과는 모험이었다. 그보다 먼저 문제가 된 것은 독일어 능력이었다.

“외국인은 독일어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수업은 들을 수 있어도 학점은 딸 수 없다. 서머스쿨의 자신감을 살려 가장 높은 코스인 6단계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하나도 들리지가 않았다. 강사는 매일 망신을 줬다. ‘실력도 없으면서 왜 이 코스에 들어왔느냐.’ 하루에 서너 시간만 자면서 이를 악물고 독일어공부에 매달렸다. 6개월 만에 합격했다.”

그는 7년 반(15학기)만인 1987년에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리고 귀국해 10년 정도 소위 ‘보따리장사’를 하다가 1998년 한양대 연극학과 교수로 임용돼 석박사과정의 학생을 지도했고, 2013년 정년퇴임했다(남편인 윤용호 고려대 명예교수는 빈 대학의 학부 1년생부터 다시 시작해 박사학위를 받고 그보다 3년 먼저 귀국해 6개월 만에 고려대 교수가 된다. 윤 교수는 오스트리아가 자랑하는 현대 작가 페터 한트케가 전공이다).

2013년 김미혜가 연출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에서 주인공 카프카가 사에키와 만나는 장면. 영어 대본을 한국어로 번역한 그가 아예 연출까지 맡았다. 그는 드라마투르그로서 경험을 쌓아온 것이 연출에 도움을 줬다고 말한다. 그는 이 작품을 연출한 과정을 자세히 기록해 ‘<해변의 카프카> 드라마투르기적 연출의 실제’라는 책을 냈다(연극과인간, 2014). PAC코리아 제공



2. 번역의 즐거움, 드라마투르그의 즐거움

연극계에서 외국작품을 번역하는 사람이 그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보다 좋은 무기를 갖고 있다. 영어는 물론이고, 독일어도 잘 한다는 것이다(그는 프랑스어도 조금 할 줄 안다). 독일어는 연극 강국인 유럽을 여는 열쇠로서 아주 요긴하다.

한마디로 번역이라고 해도 크게 나눠 두 가지가 있다. 연극대본과 학술서적 번역이다.

연극대본 번역은 뭐가 그리 재미있나.

“내가 번역한 말이 무대 위에서 쓰이는 것은 큰 기쁨이다. 나는 계속해서 대사를 조탁(彫琢)한다. 외국 작품을 우리나라 배우가 우리 작품처럼 연기할 수 있게…” 그래서 목소리를 내고 제스처를 써가며 번역을 한다는 것이다.

그가 번역할 때 쓰는 방법이 또 하나 있다.

“외국 희곡을 번역할 때 나는 적어도 중요한 인물들을 머릿속에서 캐스팅한다. 그러면 대사의 번역이 자연스러워지고, 그들이 무대 위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눈앞에 그려진다. 그것이 희곡의 좋은 번역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해변의 카프카> 드라마투르기적 연출의 실제, 김미혜, 연극과인간, 2014).

두 가지 번역 방법은 모두 ‘감정이입’을 위한 것이다.

학술서적 번역에는 무슨 원칙 같은 게 있는지.

“학생들이나 관련자들에게 꼭 필요한, 연극계에서 에포크 메이킹(epoch-making)이라는 평가를 받는 책을 주로 번역했다. 학술 서적을 번역하면 막연했던 것이 분명해져 나도 좋은 공부를 하게 된다. 또 많은 사람들이 감사하다고 하니, 성취감과 매력을 느끼기도 한다. 연극은 연기와 연출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외국은 학문적으로 매우 탄탄하다. 따라잡기가 쉽진 않지만, 시간이 더 있고 더 젊었더라면 더 많은 번역을 했을 것이다.”

번역 하면 보통 외국 서적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만을 생각하는데 그는 반대의 경험도 갖고 있다. 1995년부터 2007년까지 연세대 초빙으로 한국에 온 동베를린 출신 실비아 브래젤 연세대 독문학과 교수와 함께 한국의 현대시와 현대소설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 모두 8권의 한국작품집을 독일에서 출간했는데, 그 중에서도 황동규의 연작시(70편) ‘풍장’을 번역한 공로로 실비아 브래젤 교수와 공동으로 1996년 제4회 대산문학상(번역부문)을 수상했다. 그는 희곡도 독일어로 꽤 많이 번역했다.

당시 대학 풍토는 연기나 연출, 무대 전문가는 교수로 임용해도 연극학 이론은 찬밥신세였다. 그래서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귀국하고 4,5년이 지나면서 교수가 되는 것을 단념하고 번역에 매달렸다. 극단을 만들라는 권유도 받았으나 돈이 없어 포기했다.

그는 “내가 연극계를 위해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은 논문이나 책을 쓰고 번역을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걸 실천했기 때문에 교수가 된 뒤에도 업적 평가에 매달려 급하게 논문을 쓰거나 책을 낸 적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드라마투르그(Dramaturg)로서도 많이 활약했다. 그런데 이 말, 생소하다. 독일어다. 독일어권에서 발달한 제도여서 그렇게 부른다(영어로는 ‘드라마터그’라고 한다).

요즘 연극계에서 드라마투르그라는 말을 자주 듣지만 정확히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잘 모른다. 하는 일이 다양하고, 극단마다 역할이 틀려 한마디로 정의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조금 길더라도 독일의 경우를 들어보자.

“이들은 우선 시즌별, 연도별 레퍼토리 선정을 하며, 선정된 작품을 조달, 번역, 번안, 개작한다. 이때 작자나 원작자와의 교섭, 타협 등 법률적 차원의 일까지도 이들의 몫이다. 텍스트가 마련된 후 연출가를 물색하고, 배우의 캐스팅에 조언을 하며 무대 스태프진과 프로덕션을 위한 상의를 하는 것도 드라마투르그이다. 작품의 리허설 때 드라마투르그들은 좋은 관객 내지는 비평가의 역을 하며 최상의 실제공연을 위한 제언을 하게 된다. 드라마투르그들이 하는 대외적 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홍보이다. 포스터 제작시의 의견 제시는 물론 프로그램 책자의 편집, 이를 위한 자료 수집, 대중 매체를 상대로 하는 홍보 자료 발송, 기자회견, 강연, 공연 전후의 토론의 개최 등을 모두 이들이 담당한다”(드라마투르그 숨은 예술가, 김미혜 문예진흥원 전문위원, 문화예술 1993년 3월호),

이것만 보면 드라마투르그는 극단 대표, 연출가, 기획, 고문변호사, 헤드헌터 등을 모두 겸하는 막강한 자리인 것 같다. 특히 연출과 갈등이 심할 것 같다.

“유럽에서는 연출이 80%를 맡고, 나머지 20%를 드라마투르그가 보완해 준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의 연출은 내가 100% 다 할 수 있는데, 왜 끼어드느냐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도 많이 달라졌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에서의 역할은 아직 제한적인 것 같다.

그는 1999년 예술의전당이 만든 ‘파우스트 1, 2부’(김광림 연출)에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국내에서는 첫 드라마투르그 작업이었다고 말한다. 그때는 사례비도 따로 잡혀있지 않았고, 팸플릿에 이름조차 들어가지 않았다.

그 후 그는 종종 드라마투르그로서 참여한다.

“번역을 해서 던져 주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리허설에도 참석해 의견을 내고, 배우들 연습도 시켜주고 하니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해 달라는 제안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연출이 외국 작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니 귀띔도 해줘야 하고.”

그는 2013년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의 영어 대본(2008년 프랭크 갈라티 각색)을 한국어로 번역했는데, 아예 연출까지 맡았다. 그는 “드라마투르그를 많이 해봤기 때문에 불안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드라마투르그에는 꼭 필요한 ‘미덕’이 있다고 한다. 겉으로 드러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케 에베르트(Mike Eberth)라는 독일의 한 드라마투르그는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을 ‘소멸의 예술’이라고 표현했다.

김미혜도 이에 동의한다.

“리허설에서 드라마투르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연출자와 배우들에 대한 태도이다. 드라마투르그가 원작에 대해 어떤 의미에서는 연출자보다는 더 많이 알고, 배우들보다는 물론 이해도가 높기 때문에 연출자와 배우들을 앞서가는 월권을 행사하기 쉽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드라마투르그로서 많은 이들이 실패하는 경우가 바로 이런 맥락인 것으로 알고 있다”(드라마투르그 노트-우어파우스트, 김미혜, 공연과이론 2011년 가을호).

그는 2012년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을 논한 미국인 학자 마이클 마이크 케메스의 저서 ‘고스트 라이트(Ghost light)를 번역하기도 했다.

올 3,4월 서울시극단 창단 20주년 기념작으로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한 헨리크 입센의 ‘왕위 주장자들.’ 왕위를 둘러싼 치열한 극중 암투가 5월 대선과 겹쳐 관심을 끌었다. 1863년에 나온 작품으로 154년 만의 한국 초연. 국내 유일의 입센 전문가로 불리는 김미혜가 번역했다. 그가 번역한 입센 작품은 ‘헤다 가블러’ ‘사회의 기둥들’ ‘유령’도 있다. 그는 2011년 ‘모던 연극의 초석, 헨리크 입센’이라는 600쪽짜리 전문서를 내기도 했다. 서울시극단 제공



3. 그가 입센에 빠진 이유

김미혜를 말하면서 헨리크 입센을 빼놓을 수 없다.

“헨리크 입센은 1828년에 태어나 1906년에 서거했다. 2006년 내가 한국연극학회 회장일 때 베를린에서 열린 서거 100주년 국제학술대회에 초청을 받아 간 적이 있다. 27개국의 학자가 참가했는데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미안하다. 1930년대에는 일본을 통해 들어와서 공연된 적도 있지만 지금은 거의 무대에 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나라 학자들은 오페라, 뮤지컬 등등으로 바꿔서 올리는 자국의 사례들을 발표했다. 노르웨이 대사관에서 참석자들을 초청해 저녁을 내기도 했다. 행사에 참석하는 내내 나는 너무 우울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입센에 대한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자료는 차고도 넘쳤다. 2007년 한국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에 노르웨이를 몇 번 갔다 와야 하니 2151만원의 연구비가 필요하다고 신청했다. 그러나 떨어졌다. 재단 간부에게 장문의 메일을 보냈다. “연구에도 유행이 있다는 걸 안다. 그러나 빈 곳을 메우는 연구도 필요하다.” 몇 달 후 연구비를 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보통은 신청액의 30%를 깎고 주는데 2151만원을 그대로 다 인정해줬다. 그래서 쓴 책이 2010년의 ’모던 연구의 초석, 헨리크 입센‘(연극과인간)이다. 647쪽에 정가 3만5000원의 두툼한 책이다. 이 책은 이듬해 학술원선정 우수학술도서로 뽑혔다(그는 책이 너무 두껍지 않느냐는 지적에 남들이 아무도 안 쓸 테니까 두껍게 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그 후 입센의 ’헤다 가블러‘ ’사회의 기둥들‘ ’유령‘ ’왕위 주장자들‘도 번역해서 무대에 올리고 드라마투르그로도 참여하면서 ’입센 전문가‘의 입지를 굳혔다.

“베를린 연극제에는 매년 100편 정도의 작품이 나오고 이를 7명의 심사위원이 선정한다. 요즘도 입센 작품이 많이 나오고 선정도 된다. 4월에 미국에 갔는데 거기서는 ’인형의 집2‘라는 작품을 공연하고 있었다. 집을 나간 노라가 15년 후에 돌아오는 것을 상정한 연극이다(다시 가출한다고 한다). 외국에서는 그만큼 입센을 중시하고 사랑한다. 우리나라 연극계에서 가장 약한 고리가 희곡이다. 뒷심이 부족해서 허망하게 끝날 때가 많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나는 극작가들이 입센 공부를 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2500년 동안 희곡을 써온 나라들과 100년밖에 안되는 나라를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우리가 모던으로 오는데 반드시 거쳐야 할 산이 입센이다.”

그러고 보니 그가 쓴 ’헨리크 입센‘이라는 책의 서문 중에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그는 본인이 노르웨이어를 배우는 것은 요원한 소망이라고 고백하면서 입센의 작품을 원어로 읽기 위해 노르웨이어를 배웠던 사람들을 소개했다.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라이너 마리아 릴케, 슈테판 게오르게…. 큰 산들이 자기보다 훨씬 더 큰 산으로 입센을 보고 있다는 뜻이리라.

입센의 작품은 모두 25개로 그중 12개 정도가 번역이 돼 있다. 그 중 일부는 김미혜가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현재 17개 작품을 번역해 놓고 있다. 1년에 2, 3편은 번역할 수 있으니 수년 내에 번역을 끝내고 입센 전집을 낼 계획”이라고 말한다. 나오면 주목받을 듯하다.

김미혜는 4월에 미국을 횡단하며 지방극장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2013년에 이어 두 번째다. 사진은 유타 주 시더 시티(Ceder city)의 리어왕 동상 앞에서. 인구가 2만8000명(이중 5000명은 ‘서던 유타 유니버시티’ 학생)밖에 안 되는데도 훌륭하게 셰익스피어 페스티벌을 운영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는 우리나라 극단들도 정부 예산만 쳐다보지 말고 미국 극단의 자생력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미혜 명예교수 제공



4. 미국의 지역극장을 찾아서

그는 요즘, 내년에 출판을 앞둔 책을 손질 중이다. 제목은 ’브로드웨이의 저편-미국의 비영리극장(극단)연구‘다. 이 책은 미국의 지역극장이 어떻게 생겨나서, 어떻게 운영되며, 어떻게 지역사회와 연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나.

“연극계는 전 세계 어디나 다 가난하다. 왜 그럼 미국을 말하는가. 유럽은 너무 역사가 오래돼 우리나라와 비교가 안 된다. 그러나 미국은 1950, 60년대 지역극장운동이 일어났다. 우리나라 동인제극장운동이 일어난 것과 비슷한 시기이다. 그런데 지금 미국은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고, 지치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 그 이유가 뭔지를 말해주고 싶다. 흔히들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해당하는 미국의 NEA(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는 트럼프정권이 들어선 이후 예산을 자르겠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예술단체를 돕는 것은 포드재단, 록펠러재단, 그리고 크고 작은 패밀리재단 등이다. 국가의 지원은 적다. 보통 소요액의 50%를 주고, 나머지는 자체적으로 마련한다. 캘리포니아 극장이 주 정부로부터 한 시즌에 받는 돈은 달랑 200달러다. 상징적인 금액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정부 지원이 없으면 공연을 못한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국민소득에 비해 많이 주는 편이다. 세계의 흐름을 알고 소명의식을 갖고 일해야 한다.”

이런 주장은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는 2013년 정년을 앞두고 40일간 미국을 횡단하며 토니상을 받은 극장을 중심으로 40개의 극장을 둘러봤다. 2015년에는 뉴욕의 오프브로드웨이와 오프오프브로드웨이를, 그리고 올 4월에는 다시 미국 일주 연구여행을 다녀왔다. 상당히 많은 사비가 들어갔다.

그는 연구비를 신청하기 위해 최근에 작성한 자기소개서에서 이렇게 썼다.

“그간 연극학자, 혹은 연극인으로서 나의 인식단계는 단위 작품→작가→시대→나라 순으로 변해왔다. 나에게 있어 연극은 이제 단순히 하나의 예술 장르인 것만은 아니다. 공연장이 국민을 계도하는 하나의 기관(institution)이 된다는 것에 나의 관심이 기울여져 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 비영리극장의 예술가와 행정가들의 자긍심과 행복감에 감동했다고 밝혔다. 그는 극장을 단순히 공연을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국민이나 시민의 품격을 높여주는 교육기관으로 그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하다. 독일이 그런 나라중 하나다. 물론 미국의 사례를 우리나라에 어떻게 적용할지, 그런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나, 침체된 한국연극계에 생각거리를 던져줄 것임에는 틀림없다.

김미혜는 ’한국연극‘ 편집주간으로 세 번째 일하고 있고,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장 등도 오랫동안 맡고 있다. 연극교재연구소 회장, 한국연극예술치료학회 회장, 국제극예술협회(I.T.I.) 사무국장 등을 맡은 적도 있다. 무보수 명예직들이다. 그런데도 거절을 못하는 이유는 오스트리아에서의 경험이 한몫하는 것 같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부부가 함께 하는 유학은 참 힘들었다. 현지에서 옷감을 수입해 큰 성공을 거둔 대학 선배가 기숙사비를 도와줘 큰 힘이 됐다(나중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갚았다고 한다). 그 선배는 한인회를 통해 자신이 번 돈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했고, 그것을 실천했다. 둘째 딸을 낳고는 학업중단까지 심각하게 고민했는데, 기독교단체에 신청을 하니 귀국할 때까지 5년간의 장학금을 대줬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일년에 한번씩 아시아와 아프리카 학생을 초청해 며칠간 국내 여행을 시켜준다. 그때 들은 말이 지금도 가슴에 남아 있다.”

정부 관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러분은 우리에게 고마워할 필요가 없다. 오스트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후 장기 저리로 달러를 들여야 산업을 일으키고 거기서 얻은 이득을 적립했고, 그 적립금의 이자로써 여러분을 돕고 있다. 예전의 도움에 이제는 우리가 답할 때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원하는 것은 없다, 공부가 끝나면 모국으로 돌아가라는 것 외에는. 귀국해서 여러분보다 못 배운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 그것이 엘리트의 책무다.”

그는 “교수 시절에도 6개월 벌어 방학 때 현장 연구에 다 써버렸다. 정년을 해도 공부를 하느라 마찬가지인 것 같다”며 웃는다. 그러나 그는 “교수 시절 학생들에게 지금 외국에서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What’s happening)를 알려줄 수 있어서 나도 좋았고, 학생들도 참 좋아했다”고 회고한다(그는 한양대 재직 중 세 번 ‘베스트 티처 상’을 받았다).

“‘우리들의 선생님’인 김미혜 선생님은 요즘도 새로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흥분에 빠져 있다. 그 식지 않는 에너지를 보고 있노라면 감탄과 함께 한숨이 절로 나온다. 우리도 저럴 수 있을까. 그래도 보고 배운 게 그것이니 알게 모르게 우리한테도 저런 모습이 있겠지, 스스로 위안해 본다.”

이 글의 ‘요즘’은 ‘요즘’이 아니라 9년 전, 그가 회갑을 맞았을 때인 2008년 11월이다(김미혜 교수 회갑기념 논문집 ‘연극의 지평’ 서문에서, 연극과인간). 그는 아직 생활방식을 바꿀 생각이 없나 보다.

(김미혜 교수의 공연대본 번역과 학술서적 번역, 드라마투르그 참여 작품은 다음과 같다. ▽공연대본 번역=‘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갈릴레이의 삶’ ‘햄릿’ ‘우어파우스트’ ‘아마데우스’ ‘헤다 가블러’ ‘해변의 카프카’ ‘사회의 기둥들’ ‘유령’ ‘왕위 주장자들’ ▽학술서적 번역=‘아우구스토 보알의 억압받는 자들의 연극’ ‘아방가르드 연극의 흐름, 1892~1992’ ‘다마스커스를 향하여’ ‘부조리극’(2005년 학술원 우수도서) ‘고스트 라이트’ ‘미국의 아방가르드 연극’ ▽드라마투르그=‘파우스트 1,2부’ ‘그래도 지구는 돈다(원제 갈릴레이의 삶)’ ‘테러리스트 햄릿’ ‘마라/사드’ ‘우어파우스트’ ‘아마데우스’ ‘사회의 기둥들’ ▽연출=‘해변의 카프카’ 등)


심규선 기자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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