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호의 오늘과 내일]평양 단란주점 외상 사건

신석호 국제부장

입력 2017-07-04 03:00 수정 2017-07-04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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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호 국제부장
15년 전인 2002년 6월 30일 오전 평양 고려호텔 1층 로비. 사색이 되어 나타난 북한 안내원(한국의 국가정보원 요원 격. 방북한 남한 사람들을 안내하고 정보도 캐는 사람)이 기자에게 사정하듯 말했다.

“저∼, 기자 동무, 어제 술값 외상 다신 것부터 좀 해결을….”

전날 평양에 도착한 남쪽 기자가 궁금했던지, 아니면 술이 고팠던지 안내원들은 환영만찬 반주부터 시작해 길거리 호프집을 거쳐 결국은 3차까지 끌고 갔다. 어쩔 수 없이 따라간 곳은 외국인 전용 노래방. 여성 접대원이 맥주 따라주고 노래 한 곡 같이 불러주는 정도였다. 남한 방문객 세 명과 북한 안내원 두 명이 일본 맥주 한 병씩 먹었을 뿐인데 물경 500달러라는 계산이 나왔다. 영락없는 바가지였다.

당시 경제부 기자였던 나는 “평양 술값이 서울 강남보다 비싼 줄 몰랐네요. 그렇게 많은 현금 안 가지고 다니는데, 혹시 비자카드 받나요?”라고 반격했다. 지배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외상을 달아줬다. 그날 밤 기자는 평양에서의 난생 첫 잠을 달게 잤지만 지배인은 ‘남한 기자가 정말 약속을 지킬까?’를 고민하며 뜬눈으로 지새웠을 것이다.


촉이 밝은 기자라면 그때 알아챘어야 했다. 느리고 관료적인 사회주의 국가 국영상점 지배인의 돈벌이 욕심이 왜 그렇게 컸었는지를. 기자가 평양에 있던 7월 1일을 기해 김정일 정권은 이 노래방 지배인을 비롯해 북한 국영기업 종사자들의 임금과 물가를 크게 올리고 각자 번 만큼 인센티브를 주는 경제 개혁 조치를 단행했던 것이다.

7월 3일 한국으로 귀환한 뒤 일본 언론을 보고서야 그것이 역사적인 ‘7·1 경제관리 개선 조치’였음을 알고 땅을 쳤다. 북한 초유의 경제 개혁 조치라는 대특종을 현장에서 놓친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진리를 실감했다. 다음에 그런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로 그해 가을 학기 대학원 석사과정에 등록해 북한 경제 공부를 시작했다.

김정은도 비슷한 후회와 각오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아버지 김정일의 개혁은 순항하지 않았다. 2003년 종합시장 도입으로 속도를 더한 분권화 시장화 개혁은 2005년 평등을 앞세운 ‘북한 보수’들의 역풍을 맞고 후퇴했다. 개혁을 주도했던 박봉주 내각 총리는 실각했고 북한 경제는 2009년 11월 화폐 개혁까지 좌향좌를 계속했다.

계획과 시장을 오가다 실패한 아버지가 2011년 12월 세상을 떠난 뒤 김정은은 5년이 넘도록 시장 메커니즘을 확대하는 개혁 노선을 일관되게 걷고 있다. 2012년 화려하게 재기한 박봉주 총리는 엘리트들의 ‘줄숙청’을 비웃으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6·28방침’(2012년)과 ‘5·30문건’(2013년)으로 알려진 김정은식 개혁은 36년 만에 열린 2016년 5월 제7차 노동당대회에서 ‘우리식 경제관리 방법 전면적 확립’으로 정식화됐다.

그러나 김정은 개혁의 대외경제적 환경은 아버지 때보다 불리하다. 15년 전엔 한국이 북한의 최대 경제지원국일 정도로 남북 경제 교류가 활발했다. 북한은 중국과 신의주 경제특구를 도모하기도 했다. 다섯 차례의 핵실험과 수십 차례의 미사일 발사 시험으로 북한은 국제사회의 초강력 제재 레짐(regime)을 자초했다. 문재인 정부나 시진핑(習近平) 정부가 도와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다.

미사일 마니아인 김정은이 굳이 경제학을 공부하지 않더라도 외부에서 돈과 자원이 유입되지 않는 환경에서의 개혁은 결말이 뻔하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핵과 미사일만 내려놓으면 기꺼이 카드 들고 바가지 쓰러 가겠다는 국제사회의 큰손들이 줄을 서 있다는 점도 깨달았으면 좋겠다.

신석호 국제부장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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