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하종대]이름 잃은 취준생

하종대 논설위원

입력 2017-06-21 03:00 수정 2017-06-2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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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님, 수정테이프 좀 빌려주세요.” 하루 14시간씩 몇 달간 한 교실에 있어도 서로 이름을 모른다. 오직 학원이 부여한 번호로만 부르고 불릴 뿐이다. 요즘 취업을 위해 토익 시험 준비를 하는 기숙학원의 풍속도다. 이유는 한 가지다. 통성명을 하게 되면 ‘아는 사이’가 된다. 처지가 비슷해 쉽게 공감하고 사귀게 될 수도 있다. 결국 토익 점수가 떨어지면 나만 손해다. ‘이름 부르기 금지’는 장기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알아낸 학원 교사들의 비법이다.

▷“○번 올빼미 도하(渡河) 준비 끝.” 군대를 가본 남자라면 몇 번쯤 외쳐봤을 구호다. 유격훈련장에 들어가면 계급과 이름 대신 헬멧에 쓰인 번호로만 불린다. 올빼미는 미국의 특공훈련을 처음 받은 육사 18기 생도들에 의해 작명됐다. 용감하고 기민한 데다 한반도 어디서나 서식하는 점을 감안했다고 한다. 교도소의 수인(囚人)들도 번호로만 불린다. 400만 명을 학살한 나치 치하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수감번호를 몸에 강제로 문신하기도 했다.

▷유격장에서 번호로만 부르는 것은 계급 낮은 훈련조교가 계급 높은 대상자를 거리낌 없이 훈련시키기 위해서다. 교도소에서 번호로 부르는 것은 재소자의 익명성 보호 차원도 있지만 효율적인 통제 관리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름 대신 번호로 부르는 것은 상대의 인격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지난해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학교 수업시간에 교사들이 학생 이름 대신 번호로 부르지 못하게 하는 법안을 낸 것도 학생의 인격권 침해를 막자는 취지였다.

▷경기 군포의 토익 기숙학원 학원생들은 4년이 넘는 기간 단 한 사람도 이 규정을 어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취업이 절박했을 것이다. 400점대 학생들의 토익 점수는 보통 3개월 만에 700점대로 향상됐다고 한다. 올해 4월 우리나라 청년실업률은 11.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회원국 중 증가폭이 가장 가팔랐다. 체감실업률은 지난달 말 22.9%로 청년 4, 5명 중 1명은 실업 상태다. 연애도 이름도 잊은 채 취업 준비에만 매달리는 우리 청년들이 안쓰럽다.
 
하종대 논설위원 orion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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