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 탄압 예상… 시간 빨리 가길 기다렸을 뿐”

손효림기자

입력 2017-05-19 03:00 수정 2017-05-1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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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계 블랙리스트로 고초 겪은 박근형 연출가

박근형 연출가는 정권 교체에 대해 “사필귀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문화예술 정책을 펼 때 재정자립도 등 수치를 따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면 상업주의가 심화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그런 일이 있을 거라 예상했기 때문에 당황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내가 당사자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17일 서울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만난 박근형 연출가(54)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는 공연계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라 고초를 겪은 대표적 인물이다. 이곳에서는 그가 극본을 쓰고 연출한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가 재공연되고 있다.

‘모든…’은 2016년 한국의 한 부대에서 탈영한 병사, 1945년 자살특공대를 선택한 조선인 가미카제, 2004년 이라크 무장단체에 살해된 한국인, 2010년 백령도 초계함에서 숨진 해군의 이야기가 팽팽하고 밀도 있게 교차된다. 지난해 동아연극상 작품상과 시청각디자인상 수상작이다.

박 연출가는 2013년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판한 연극 ‘개구리’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각종 지원에서 배제됐다. ‘모든…’은 201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창작산실 작품에 선정됐지만 예술위의 강요로 그는 지원포기서를 써야만 했다.

“많은 사람이 힘든 시기를 보냈고, 저도 그중 한 사람일 뿐입니다. 심리적으로 위축되진 않았어요. 그저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기다렸습니다.”

그는 ‘개구리’에 대해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 일을 사실대로 쓴 것이라고 했다. 대사가 거칠고 너무 노골적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나는 ‘날것’ 그대로를 무대에 많이 올렸다”고 답했다. ‘개구리’를 재공연할 생각이 있느냐고 묻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작품의 유명세에 편승하고 싶지 않습니다. 능력이 부족해 내가 말하려는 바를 흡족하게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모든…’이 군인을 희화화했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는 강하게 반박했다. “군대 시스템은 개선할 점이 있지만 우리를 안전하게 살 수 있게 해주는 군인은 고마운 존재입니다. 그런 군인을 희화화했다면 못된 짓이죠.”

실제 이 작품은 국가, 전쟁, 군대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스러져간 개인을 한 명 한 명 비추며 이들도 사연이 있고, 삶을 이어가려는 열망이 강한 존재였음을 웅변한다. “가미카제가 돼 야스쿠니신사에 묻힌 조선인 청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작품을 구상했습니다. 가슴이 아팠어요. 자발적인 선택일 수도 있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사정이 있었겠죠.”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군대와 관련된 비극적인 상황을 스케치하듯 보여주고 싶었단다. “분단과 약소국의 설움 등 현재 진행형인 문제를 생각해 보자는 취지였어요. 동시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버겁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게 연극이니까요. 감히 희망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시대적으로 후퇴한 한국 사회가 다시 첫발을 내디디고 있다고 진단했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된 이유를 찾기 위해 마당을 하나하나 쓸며 비질하는 마음으로 걸어 나갈 겁니다. 관객을 즐겁게 만들 일도 찾을 거고요.”

공연은 6월 4일까지. 인천문화예술회관(16, 17일)과 성남아트센터(22∼24일)에서도 공연된다. 3만 원. 02-758-2150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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