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보복 피해 정부지원금 받아드립니다”… 中企 두번 울리는 불법브로커 활개

정민지기자

입력 2017-04-05 03:00 수정 2017-04-0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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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출 급감 고통 겪는 여행사 등 상대… 중기청-중진공 직원 사칭 접근
지원금액 절반 성공보수 요구… 수수료 챙기거나 선금 받고 잠적
기업들 불이익 우려해 신고 꺼려


지난달 말, 찾아오는 손님 한 명 없던 서울 중구의 한 여행사 사무실. 전화벨 소리가 사무실의 적막을 깼다.

수화기 너머 상대는 대뜸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 조치로 어려워진 여행업계를 돕기 위해 정부 지원 보조금이 새로 나왔습니다. 직접 찾아뵙고 설명 드릴까요”라고 물었다. 직원 A 씨가 “아웃바운드(내국인의 해외여행) 상품만 취급하는 업체인데도 해당이 되냐”고 묻자 상대는 “상관없다. 다 된다”고 말했다.

직원 A 씨는 일단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은 뒤 인터넷에서 검색을 했다. A 씨는 “정부 기관인 줄 알았더니 홈페이지를 찾아보니까 그냥 민간업체였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며 황당해했다. 비슷한 내용의 전화를 받은 서울 금천구 B여행사 대표도 “처음엔 혹했지만 친절하게 전화를 돌려가며 정책 홍보를 하고, 사무실로 온다고까지 하니까 왠지 찝찝해서 거절했다”고 말했다.

사드 배치와 관련한 중국의 경제 보복으로 어려움에 빠진 중소 여행사와 중소기업을 노린 불법 브로커들이 판을 치고 있다. 지난달 22일 정부가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열고 ‘관광시장 활성화 방안’을 발표한 이후부터다. 브로커들은 중소 여행사에 무작위로 전화를 돌리거나 산업단지에 ‘당신도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적힌 전단을 유포하고 있다. 올해에는 사드 관련 지원책들이 잇따르면서 스팸전화 수준으로 활개를 치는 분위기다.

이 중에는 중소기업청이나 정책자금 집행기관인 중소기업진흥공단(중진공) 직원을 사칭하며 불법 브로커 행위를 하는 곳도 많다. 많게는 지원 금액의 절반 가까이를 성공 보수로 떼어 달라고 하기도 한다. “불법 브로커인데도 홈페이지에 버젓이 ‘불법 브로커 신고센터’를 운영하기도 한다. 어떤 곳은 재무제표 같은 기업 정보를 다 보내라고 해 놓고 잠적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중진공에 따르면 정책자금 불법 브로커들은 △정부기관 명의를 명함에 사용하거나 해당 기관 직원을 사칭하고 △신청 서류를 허위로 작성하거나 위·변조 후 수수료를 요구하거나 △지원 대상이 아닌데도 인맥을 통해 지원받게 해 주겠다며 접근해 선금만 받고 잠적하고 △사전 접촉을 위한 경비(일명 ‘미팅비’)를 요구한 뒤 잠적하는 등의 불법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브로커들이 기승을 부리자 지난주 한국여행업협회(KATA)는 회원사들에 ‘불법 브로커 주의보’ 공문을 보내기까지 했다. 협회 관계자는 “‘이런 전화를 받았는데 맞느냐’는 회원사들의 문의가 급증하고 있다. 일단 의심이 들면 협회에 문의하라고 당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합법적인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도 있다. 자본금과 전문 인력 등 일정 요건을 갖춘 컨설팅 업체 240여 곳은 중소기업 상담회사로 중소기업청에 등록돼 있다. 이들은 사업성 평가와 자문 등의 전문적인 컨설팅을 하며 중소기업의 경쟁력 향상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책자금 불법 브로커’ 문제에 정부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중기청, 중진공은 지난달 정책자금 브로커 신고 포상금을 기존의 두 배인 200만 원으로 올리고 계도 활동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브로커를 신고해 포상금을 실제로 지급한 건 2009년 제도 도입 이후 단 한 건도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중진공 관계자는 “27건의 신고가 접수됐지만 막상 경찰에 수사 의뢰를 하는 과정에서 중소기업들이 합의를 해 버리거나 물증을 내놓지 못해 모두 법적인 제재까지 이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수사권이 없는데 사전 단속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며 단속에 한계가 있다고 덧붙였다.

불법 브로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데는 중소기업들이 피해를 감추려는 분위기도 한몫한다. 한 중소기업계 관계자는 “브로커에게 속아 수천만 원씩 피해를 봐도 이 사실이 알려지면 나중에 정책자금을 신청할 때 불이익을 받거나 이미 받은 정책자금마저 취소될까 봐 겁이 나 신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정민지 기자 jm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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