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종의 오비추어리]‘석유왕’ 록펠러의 마지막 손자

이유종기자

입력 2017-03-29 09:00 수정 2017-03-29 09:00

|
폰트
|
뉴스듣기
|
기사공유 | 
  • 페이스북
  • 트위터
미국의 첫 억만장자인 ‘석유왕’ 존 D. 록펠러(1839~1937년)의 마지막 친손주 데이비드 록펠러가 뉴욕 주 포칸티코힐즈 자택에서 20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101세.

데이비드는 존 D. 록펠러의 외아들인 존 D. 록펠러 주니어(1874~1960년) 슬하 5남 1녀 중 막내다. 록펠러의 3세대 중 유일하게 생존한 인물이었다.

데이비드는 1915년 뉴욕에서 태어나 1946년 체이스내셔널은행(현 JP모건체이스은행)에 들어가 평생 은행 경영인으로 살았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대통령 고문, 특사 등을 맡으며 정치권과 경제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형제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면서 록펠러가(家)의 재단, 펀드, 자선사업, 예술품 등을 총괄했다. 2015년 100세 생일을 맞아 메인 주(州) 국립공원에 인접한 1000에이커(약 122만4174평)의 부지를 기증했다. 자산은 지난해 기준 31억 달러(약 3조4496억 원)로 전 세계 200대 부호 중 하나로 꼽혔다.






● ‘재벌 3세’ 출신 금융인

데이비드는 뉴욕 록펠러 저택에서 성장한 전형적인 ‘은수저’였다. 1936년 우수한 성적으로 하버드대를 졸업했고 영국 런던정경대학(LSE)을 거쳐 1940년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카고대는 그의 할아버지가 세운 학교다. 그는 LSE 재학 시절 장차 제35대 미국 대통령에 오른 존 F. 케네디와 만났고 케네디의 여동생 캐슬린(1948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과 잠시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데이비드는 박사학위를 받은 뒤 18개월 동안 연봉 1달러를 받고 뉴욕시장을 3번이나 역임한 피오렐로 라구아디아의 비서를 맡았다. 국방부, 보건복지청 등에서 일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육군 장교후보생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북아프리카, 프랑스에서 정보장교로 복무하다 주프랑스미국대사관 근무 국방무관의 부관 등을 거쳐 대위로 전역했다.

데이비드는 1946년 체이스내셔널은행에 입사해 해외은행 협력, 국제 상품거래 등 국제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당시 은행장은 외삼촌인 윈슬럽 W. 올드리치였다. 체이스맨해튼은행은 ‘록펠러의 은행’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록펠러가는 오랫동안 밀접한 관계를 맺었을 뿐 지분 5% 이상을 소유한 적이 없었다. 이 은행은 금융기관, GE 등 대기업들이 주요 고객이었다. 할아버지가 세운 스탠다드 정유의 후신인 엑손모빌과도 거래도 많았다. 데이비드는 1960년 은행장에 올랐고 1969~80년 최고경영자(CEO), 회장을 맡는 등 인생 대부분을 금융인으로 지냈다.

그는 국제화를 추구했다. 그는 체이스맨해튼은행이 전세계 5만 곳 이상의 은행 지점과 거래하도록 만들었다. 냉전 시절인 1973년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 처음으로 지점을 개설했고 같은 해 중국인민은행과 처음으로 거래를 튼 미국은행이 됐다. 하지만 그가 은행장에 취임할 당시 체이스맨해튼은행은 업계 정상이었으나 점차 경쟁은행인 씨티은행에게 자산, 순이익 부분에서 밀렸다. 그의 업적이 국제화 이외에는 뚜렷하지 않다는 비판도 있다. 체이스맨해튼은행은 그가 회장에서 물러난 뒤 여러 차례 인수·합병(M&A)을 통해 현재 JP모건체이스 은행이 됐다.






● ‘록펠러 파워’로 전세계 정상과 교류

그는 단순한 은행 CEO가 아니었다. 개발도상국을 방문하면 국가 원수와 다름없는 대접을 받았다. 끊임없이 각국 지도자들을 만났고 각종 국제회의에 참석했다. 중국의 최고지도자였던 덩샤오핑(鄧小平)은 물론이고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도 막역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 등 40년 동안 진영을 가리지 않고 200명 이상의 국가 정상들을 만났다.

미국외교협회(CFR) 회장을 지냈고 북미, 유럽, 일본의 관계 강화하는 ‘3자 위원회’를 설립하는 등 외교 분야에서도 업적을 남겼다. 루마니아의 마지막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데이비드는 매우 매력적인 동시에 가장 강력한 지도자 중 한 명”이라고 찬사했을 정도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데이비드는 록펠러 3세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데이비드는 제34대 미국 대통령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953~61년 재임)부터 거의 모든 시기 대통령들에게 자문을 해왔다. 각종 비공식 특사도 여러 차례 맡았다. 그는 일개 은행장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제39대 미국 대통령이었던 민주당 출신의 지미 카더(1977~81년 재임)는 공화당 성향의 데이비드에게 재무장관을 제안했으나 사양했다.

데이비드는 1981년 체이스맨해튼은행에서 물러난 뒤 자선사업가로 활동하며 뉴욕현대미술관(MoMA), 록펠러대, 하버드대 등에 재산을 기부했다. 2004년 셋째 형 로렌스가 숨지자 마지막 남은 록펠러 3세로 가문의 수장을 맡아 재단, 기관 등을 총괄했다.






●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록펠러 3세들

록펠러 2세(존 D. 록펠러 주니어)는 5남 1녀를 뒀다. 록펠러 3세는 대부분 하버드대, 프린스턴대, 예일대를 졸업한 뒤 기업 경영에 매달리기 보다 ‘록펠러’라는 가족의 브랜드를 디딤돌로 정치,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장녀 아비가일(1903~76년)은 결혼한 뒤 뉴욕메트로폴리탄미술관, 현대미술관 등의 후원자로 나섰으며 뉴욕 주의 공원들을 관리하는 그린에이커 재단을 세우기도 했다. 장남 록펠러 3세(1906~1978년)는 록펠러재단 이사장을 맡아 1978년 교통사고로 숨질 때까지 가문의 재산을 총괄하며 각종 자선사업에 관여했다. 차남 넬슨(1908~1979년)은 정계에 입문해 뉴욕주지사, 부통령(제41대)을 역임했다. 3남 로렌스(2010~2004년)는 할아버지이 뉴욕증권거래소에서 하던 역할을 이어 받아 투자자로 활약했다. 그는 벤처캐피탈회사를 세워 애플, 인텔 등 숱한 기업에 투자했으며 그랜드티턴국립공원 확장 등 자연보호에도 기여했다. 4남 윈스럽(1912~1973년)은 1953년 아칸소 주로 이주해 자신의 회사를 세우고 자선사업을 했으며 지역 정가에서 활약해 제37대 아칸소주지사(1967~1971년)를 지냈다. 록펠러 3세들은 1940년 록펠러브라더스 펀드를 만들어 사회 공헌을 이어가고 있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라이프



모바일 버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