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제충만]아버지의 지도와 나의 내비게이션

동아일보

입력 2017-03-02 03:00 수정 2017-03-0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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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제충만 세이브더칠드런 권리옹호팀 대리
몇 년 전 아버지는 눈이 부쩍 침침해져서 운전대를 내려놓았다. 난 가족할인 가격으로 차를 인계받았고, 내게 맞게 차를 정리하던 중 해묵은 지도책 하나를 발견했다. 휴게소에서 샀을 법한 그 지도책을 보니 항상 먼 길 가기 전 한참이고 들춰보던 아버지 모습이 기억났다. 난 지도책을 치우고, 거치대를 세웠다. 거치대에 스마트폰을 끼우고 앱을 켜면 지도가 나온다. 가장 빠르게 가기 위해 어디로 가라는 상냥한 안내 멘트도 반갑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스마트폰을 들고 길거리를 다니며 포켓몬을 잡는다고 한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엔 밤늦게 부모님 몰래 33.6kbps 모뎀으로 게임을 했다. 모뎀이 전화선을 이용했기 때문에 게임을 할 때면 전화가 안 됐다. 낮에는 부모님께 들킬 가능성이 높아 친구와 사전모의를 하여 야심한 시각에 접속했다. ‘삐비비삑’ 하는 새된 연결 소리에 부모님이 깰까 심장이 쫄깃해지던 시절이 있었다.

지도와 내비게이션, 모뎀과 스마트폰, 과학기술이 이끄는 삶의 변화는 세대 간 경험 차이뿐만 아니라 유년시절도 바꿔 놓는다. 4차 산업혁명도 거창해 보이지만 실상 아이들이 맞이해야 할 삶의 모습일 것이다. 과연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한 아이가 졸린 눈을 비비고 학교 갈 채비를 한다. 가방을 메고 현관문을 열면 학교다. 힘든 수업을 마치고 학교 문을 열면 이번에는 학원이 기다리고 있다. 학원을 마치고 문을 열면 다시 현관문이다. 이게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싶지만 무인자동차 시대에 우리 아이들이 맞이할 미래일지 모른다.

다임러 AG 이사회 의장 디터 체체는 “자동차는 운송수단을 넘어 드디어 움직이는 주거지가 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무인자동차는 그저 차 안에서 커피 마시고 휴대전화를 해도 된다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인공지능 자동차가 네트워크의 일부로서 움직이고, 하나의 거대한 운송수단이 된다. 자동차가 바퀴 네 개에 뚜껑 덮인 모양에서 벗어나 이동하는 공간이라고 가정하면 상상력이 발동한다. 아이들이 학습하는 동안 인공지능은 다른 공간으로 아이들을 실어 나른다. 아이들은 문을 열어 환승하기만 하면 된다. 집-학교-학원의 뺑뺑이 시간이 혁명적으로 단축되어 아이들은 더 공부할 수 있다. 멋진 신세계다.

이런 미래는 어떨까. 20세가 된 아이는 인간자격증 시험을 보았다. 미성숙하고 판단력이 부족한 아동이라는 딱지를 떼고 드디어 인간이 되는 첫발을 뗀 것이다. 아이는 동물과 인간 사이, 아동으로서 이제는 나이도 찼으니 자격증을 따서 꼭 인간이 되겠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수명이 비약적으로 늘어나면 맞이할 미래는 이런 모습일까?

빌 메리스 구글벤처스의 창업자는 “인간 수명을 500세까지 늘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인류는 나노로봇을 활용하여 질병을 치료하고 노화를 일으키는 유전자를 변형시켜 수명이 비약적으로 증가할 수도 있다고 한다. 만약 인류의 기대수명이 정말 500세에 이른다면 어른들이 보기에 아이들은 얼마나 미성숙하고 부족한 존재일까. 자신들은 수백 년에 걸쳐 경험과 지식을 쌓아왔는데 이제 고작 20세 남짓한 아이들은 도저히 같은 인간이라고 불러서는 안 될 것 같다. 민주주의와 성숙한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19세 미만 아이들에게 인간이 되기 위한 자격시험을 치르게 해야겠다. 멋진 신세계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아이들이 아이로서 또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혁명적인 변화가 있지 않으면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해도 결과는 ‘멋진 신세계’다. 로봇 선생님이 아이들이 말을 잘 듣지 않고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때리거나 윽박지르고, 가상현실 기기 안에서만 친구를 만나 자연을 노니는 그런 미래, 이게 아이들에게 주고 싶은 멋진 신세계는 아니지 않나.

제충만 세이브더칠드런 권리옹호팀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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