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봉균의 마지막 고언 “정치 불확실성 없애면 경제 살아나”

이상훈기자

입력 2017-02-02 03:00 수정 2017-05-03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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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극복 경제사령탑’이 남긴 한국경제 해법

 
“정치적 혼란과 불확실성만 없어지면 경제는 살아날 수 있습니다. 경제가 정치 중립적으로 굴러갈 수 있도록 개혁한다면 성장 잠재력이 발휘될 겁니다.”

 지난해 11월 30일 서울 중구 더플라자호텔. 1997년 발생했던 외환위기의 극복 과정을 담은 회고록 ‘코리안 미러클 4: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어’의 발간을 기념한 보고회가 열렸다.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앉은 헤드테이블에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이 자리했다. 한눈에 봐도 병세가 느껴질 만큼 수척한 행색이었다. 하지만 그는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최순실 씨 국정 농단 사태로 혼란에 빠진 나라에 대한 우려와 해법을 쏟아냈다. 이때가 지난달 31일 별세한 강 전 장관의 마지막 공식 활동이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한국 경제에 대한 고언(苦言)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 “첨단산업 무장만이 살길”


 
1985년 11월 19일, 당시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장이었던 고인은 일자리 문제를 두고 동아일보가 개최한 전문가 좌담회에 참석했다. 섬유, 신발 등 노동집약적 산업이 사양산업으로 저물며 실업 문제가 경제정책의 화두였던 때다. 자동화가 일자리를 앗아갈 수 있다는 고민도 처음 대두됐다.

 “지나친 투자는 위험이 크니 중소기업 위주의 산업 발전에 역점을 두자”는 일각의 주장에 고인은 정면으로 반박했다. “첨단산업과 기술집약적 업종으로 산업구조 개편을 촉진해야 한다. 겉으로는 고용효과가 작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1980년대 중반 싹트기 시작한 전자산업 등을 키우겠다는 고인의 일성(一聲)은 고스란히 정책으로 이어졌다.

 한국 경제의 최대 과제인 산업 구조조정에도 고인은 깊숙이 관여했다. 외환위기 직후 산업 구조조정의 실전 사령관 역할을 맡았던 것. 청와대가 민간 기업의 사업 재편에 개입하는 ‘빅딜’로 추진되면서 상시적 구조조정으로 정착되지 못했다는 한계가 컸지만, 고인은 “가시적 측면에서 상징성이 컸고 국민과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보여줄 구조조정의 상징으로 중요했다”고 회고했다. 구조조정 원칙에 대해 고인은 “재벌 회장을 살리는 게 아니라 회사 자체를 살려 근로자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 “재정 건전성은 경제 최후의 보루”


 고인은 야당에서 3선 의원을 지냈지만, 경제정책에서는 반(反)기업 정서를 등에 업은 당내 주류세력과 철저히 다른 노선을 걸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이 무상급식, 반값 등록금 등의 공약을 내놓자 고인은 “당이 내놓은 재원 대책이 모두 엉터리다. 재정 건전성 악화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이런 정책을 던지는 게 합당한가”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정계를 은퇴한 뒤에도 고인의 행보는 계속됐다. 2015년 3월 본보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건전재정포럼 대표를 맡으며 한국 경제가 새겨야 할 조언을 잇따라 내놓기도 했다. 고인은 “복지는 한번 시작하면 축소하거나 되돌릴 수 없는 성격이 있다. 한번 빚으로 시작하면 영원히 빚을 짊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복지가 필요하다고 마구잡이로 도입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였다.

 공직자들이 영혼 없이 정권의 도구로 쓰인다는 비판이 많지만, 고인은 행동으로 후배들에게 공직 철학을 보여줬다. 과장 시절인 1980년대 초, 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서 고인을 영입하려 하자 “그런 곳에 안 간다. 그쪽으로 발령을 내면 공무원을 그만두겠다”며 거부했다. 김영삼 정부 시절, 청와대가 ‘신경제 5개년 계획’에 관치금융 개혁을 슬그머니 빼려고 했을 때 차관보였던 고인이 경제수석에게 대들었다가 좌천당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고인은 “시장경제를 제대로 하려면 금융자율화가 핵심인데 금융을 빼고 뭘 하라는 것이냐. 그런 거라면 나에게 시키지 말라”고 반기를 들다가 자리를 내놔야 했다.

세종=이상훈 기자 janua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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