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겨울에 만난 붉은 꽃터널

조성하 전문기자

입력 2016-12-31 03:00 수정 2016-12-3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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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하 전문기자의 코리안 지오그래픽]거제 바람의 언덕-지심도

《강하게 때론 약하게 함부로 부는 바람인 줄 알아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바람은 용케 찾아 간다 바람 길은 사통팔달(四通八達)이다.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가는데 바람은 바람의 길을 간다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천상병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한겨울이면 늘 칼바람이 불어대어 ‘바람의 언덕’. 그런데 이달 24일엔 어찌된 일인지 바람 한 점 없이 평온했다.
 오늘은 세밑. 한 해를 매듭짓는 이런 마지막 날엔 후회보다는 희망을 펼치게 마련. 그런데 올 병신년(丙申年)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청와대를 제집 드나들 듯하며 국정 전반을 농단한 ‘깜’도 안 되는 여인과 그 말을 듣고 나라살림을 꾸린 대통령, 거기에 대통령의 지시를 ‘받들어총!’ 자세로 따르던 고관대작과 영혼 없는 관리, 거기에 장단 맞춰 돈을 뿌려가며 이권을 챙긴 재벌 기업의 작태 때문이다. 허탈과 자괴감이 몰려온다. 

 그래서 찾은 곳이 여기, 바람의 언덕이었다. 이 연말에 굳이 여길 떠올린 건 세차고도 차가운 칼바람이 그리워서였다. 여기 선 채로 가슴을 풀어헤치면 가슴속 켜켜이 쌓인 울울함이 단박에 씻겨 나갈 것 같아서다. 그런데 서울에서 반나절이나 걸려 어렵사리 찾은 그날은 아쉽게도 그 바람이 불지 않았다.

 처음 이 바람의 언덕을 찾은 건 10여 년 전. 바다로 돌출한 이 바위 지형의 배후 도장포엔 민가 몇 채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포구는 번화가로 변했고 그 앞은 밀려든 여행객의 자동차로 꽉 들어찼다. 바람의 언덕이 내려다뵈는 산등성 중턱에선 뜬금없는 풍차가 모터로 바람개비를 돌리고 거기까진 계단길이 놓였다. 제주도 서귀포의 섭지코지를 연상시키는 이곳 풍광이 소문난 후 비롯된 목불인견의 인재다.

 그날 저기서 이 시를 꺼낸 건 바람 없는 바람의 언덕에서 불현듯 일어난 상념의 결과.

 의외의 무풍이 이 구절을 일깨웠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길을 바람은 용케 찾아 간다’는.

 

●동백의 섬 지심도
 
섬 전체가 동백나무… 카펫처럼 떨어진 꽃잎 장관

 
숲터널의 산책로에 떨어진 동백꽃. 싱그러운 녹음에 빨간 꽃 떨기가 더더욱 도드라진다. 지심도의 한겨울은 이렇다. 이제 막 피어난 꽃과 기름이 잘잘 흐르는 동백나무 푸른 잎으로 이렇듯 생기가 넘친다. 조성하 기자 summer@donga.com
 온통 바위로 된 작은 섬 지심도. 거기 동백(冬柏)은 곱기도 곱다. 도발적인 빨간 꽃은 물론이고 윤기가 짠하게 흐르는 초록 잎도 그렇다. 섬엔 그 아름다움을 해칠 만한 인공이 거의 없다. 주민이라곤 기껏 열다섯 가구이고, 방문객도 주로 주말에 하루 400∼500명 정도다.

 동백은 울울창창(鬱鬱蒼蒼)이다. 어찌나 빽빽한지 숲 안으론 햇빛이 단 한 점도 들어서지 못한다. 동백섬이란 별명은 거기서 왔다. 장승포 항에서 섬까지는 15분. 지심도를 찾는 이유는 조용히 산책을 하고, 한려해상국립공원 바다를 보기 위해서다.

 울창한 동백 숲의 산책로는 기막히다. 터널을 이룬 곳도 있다. 거길 걷노라면 절로 힐링이 됨을 느낀다. 싱그러운 녹음 아래에서는 달고 맛있는 공기를 호흡하고, 숲 밖에서는 한려수도 푸른 바다 한가운데서 펄펄 뛰는 바다와 하늘의 기운을 들이켜서다. 

 동백이 피는 시기는 12월부터 이듬해 4월. 그래서 지금 지심도는 꽃 대궐을 이루고 있다. 동백꽃은 땅에서도 핀다. 떨기째 떨어진 뒤에도 한동안 생기를 잃지 않기에 그런 말이 나왔다.

 꽃잎부터 지는 보통의 꽃과 달리 떨기째 떨어져 땅바닥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그러니 떨어진 꽃잎에도 애정이 갈 수밖에. 문을 닫은 지심분교 운동장도 지금 동백의 낙화로 온통 벌겋다.

 지심(只心)이란 이름. 야트막한 산 지형의 섬이 ‘마음 심(心)’자의 두 번째 획을 닮았다 해서 붙여졌다. 섬 동쪽과 서쪽의 끝, 선착장과 산정을 잇는 통행로는 아주 잘 정비됐다. 게다가 한겨울의 지심도는 아열대의 온난한 기운에 싸인다.

 그래서 웅크린 가슴을 펴고 겨울 태양 아래서 따뜻한 해바라기를 한껏 즐길 수 있다. 한겨울 밤엔 은하수를 볼 수도 있다. 민박도 여러 곳이어서 하룻밤 정도 지내는 데는 불편이 없다.

 산책 중엔 1935년 일제 해군이 태평양전쟁에 대비해 만든 포대(4곳)와 탄약고 등 군사시설도 지난다.
 

●고난의 섬 거제도
 
임진왜란-러일전쟁-6·25 상처 고스란히… 조선업 불황에 또 신음
 

 ‘택리지(擇里志)’는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1690∼1752)이 조선 팔도를 답사한 뒤 펴낸 인문지리서. 관직에서 물러난 사대부가 살기에 좋은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거기엔 기준이 있었다. 좋은 지리와 생리(生利·생활에 필요한 물자나 방법), 인심과 아름다운 산수다. 그러고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갯가가 가장 살기 힘들다고.

 그렇다면 최악의 장소는 섬인데 대한민국엔 현재 3215개(해양수산부)의 섬이 있다. 그중 한려해상공원 동쪽 끝 거제도는 제주도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 면적(379km²)이 서울의 3분의 2 정도다. 이런 유인도는 전국에 494개. 이중환의 말대로라면 섬 주민들은 팍팍하게 살아왔을 터. 내겐 거제도가 특히 더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수가 있을까’라고 할 만큼 고난의 역사가 끊이지 않은 곳이라서다. 

 우리는 임진왜란(1592년 발발)과 정유재란(1597년 8월∼1598년 12월)을 나누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는 줄곧 이어진 전쟁이었음에도. 기세가 꺾인 왜군은 1594년 4월부터 정전에 들어가 명나라와 담판을 개시하는데 정유재란을 일으키기까지 4년 내내 조선을 떠난 게 아니었다.

 당시 그들은 남해안 곳곳에 왜성을 쌓고 주둔하며 반격을 준비했다. 순천과 진주, 가덕도(부산 강서구) 등지다. 이곳을 잇는 방어선의 중심은 진주와 가덕도 사이의 거제도. 거제도 북쪽에 왜성을 세 개나 만든 이유다. 결국 조선의 수군은 이 방어선을 두고 왜군과 대치했다.

 그런 거제가 300여 년 후엔 또다시 일제의 핍박을 받는다. 경술국치(1910년·한일강제병합조약 체결) 6년 전(1904년) 집단이주해온 일본어민에게 장승포를 내주면서다. 주민들은 광복을 맞을 때까지 일본선단의 어업노동자로 전락했다. 중국 칭다오, 다롄과 더불어 동양 3대 어장이라 불리던 남해의 어로권을 ‘조일통어장정’으로 일본에 빼앗겨서였다. 

 그뿐이 아니다. 일본은 러일전쟁(1904∼1905년) 중엔 송진포에 해군기지를 지어 요새화했다. 러시아에 이긴 후엔 대봉산에 승전기념비까지 세웠다. 또 중국대륙침략기인 1935년엔 지심도에서 주민을 내쫓고 포대를 설치한 뒤 중대병력(100여 명)을 주둔시켰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거제도는 또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6·25전쟁 중 흥남철수 때 탈출한 피란민 10만 명이 이주해 오고, 인민군포로수용소까지 설치됐다. 그렇지 않아도 살기 힘든 섬 주민에게 전쟁은 또 다른 고통이었을 터. 그럼에도 주민들은 주먹밥을 만들어 피란민에게 나눠주고 골방과 창고까지 내주는 인심을 베풀었다. 당시 피란민은 주민 10만 명보다 더 많았다. 부산에서 옮겨온 이까지 포함해 15만 명이나 됐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조선업 불황으로 인한 경기침체 때문이다. 주민의 80%가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 등 조선업에 종사하고 있으니 그 여파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관광경기 덕이라도 볼 수 있도록 거제를 많이 찾아주어야 한다.
 
거제(경남)에서 조성하 전문기자 summer@donga.com
 


※여행정보




 찾아가기: ◇손수운전: 서울∼경부고속도로∼통영대전고속도로∼거제대로(418km·5시간 20분)∼해금강로∼바람의 언덕. 통행료 1만9900원 ◇대중교통 ▽KTX+렌터카 △KTX: 서울∼부산 △렌터카: 부산역∼거가대교∼거제중앙로∼학동삼거리∼거제대로∼해금강로∼바람의 언덕(86km·2시간 소요). 거가대교 통행료 1만 원. ▽고속버스: 서울(남부터미널)∼거제(고현터미널). 390km, 4시간 20분 소요. ▽직행버스(부산∼거제): 하단역 환승센터(부산)∼연초면 맑은샘병원(거제). 20분 간격(하루 40회) 운행, 4500원(카드 4200원). 055-639∼4534(거제시청)


 바람의 언덕: 거제시 남부면 갈곶리. ‘띠밭늘’이라 불리던 돌출 지형은 탁 트인 바다 풍광이 멋지게 조망돼 거제의 명소가 됐다. ‘1박2일’ 촬영지. 그 옆 도장포에선 외도·해금강 유람선이 떠난다.


 동백섬 지심도: 0.36km²의 작은 섬(일운면 옥림리). 가장 높은 지점은 97m. 15가구 거주, 오토바이가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유람선: 장승포항의 ‘동백섬 지심도 터미널’(거제시 장승포동 702-3)에서 탑승. 2시간 간격(오전 8시 반∼오후 4시 반) 운행(3.5km·15분 소요). 장승포행도 마찬가지(오전 8시 50분∼오후 4시 50분). 승선료 1만2000원(왕복). 스마트폰에 ‘지심도 오디오가이드북’ 앱(무료)을 깔면 산책 도중 특정 장소에서 자동으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섬 산책은 2, 3시간 소요. 민박 안내 등 정보 055-681-6007, www.jisimdoro.com

 맛집:
△청해 막썰이횟집: 장승포 부두 앞 신부시장. 생선회를 1kg에 2만 원 받고 포장해 주는데 지심도에 갈 때 싸가지고 간다. 회덮밥 1만2000원. 055-681-5224


 블루시티 거제: 거제관광문화 정보사이트(http://tour.geoje.go.kr). 조류인플루엔자(AI) 유입을 막기 위해 송년 불꽃놀이축제와 2017 신년해맞이행사 취소. 거가대교 건너 거제도에 들어서면 김영삼 대통령 생가와 기록전시관(장목면 외포리 1372·055-639-8290)이 있는 대계(大鷄)마을이 멀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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