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2016 상권 대변화… ‘골목’이 살아나다

천호성기자 , 강성휘기자

입력 2016-12-24 03:00 수정 2016-12-2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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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상권 지도]

 
22일 서울 용산구 용산구청 뒷길. 부슬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이국적인 느낌이 나는 한 식당 밖에 10여 명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은 칼국수면으로 만든 파스타 등 개성적인 음식으로 최근 온라인 공간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퓨전(fusion) 주점이다. 경기 성남시 분당구에 위치한 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김명재 씨(26)는 “회사 동료의 ‘인스타그램’에 이 식당 사진이 자주 올라오는 것을 눈여겨보다 찾아오게 됐다”고 말했다.

 동아일보가 BC카드 빅데이터센터와 함께 서울의 25개 주요 상권을 조사한 결과 최근 3년 새 카드 사용액이 가장 가파르게 늘어난 곳은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 주변 일대에 형성돼 있는 용산구청(일명 녹사평역 사거리) 상권이었다. 독특한 개성과 매력을 가진 가게와 사람들이 새로운 문화의 ‘씨앗’을 뿌리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입소문이 퍼져 매출 증가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 살아난 골목… 문래예술촌 SNS세대들로 ‘북적’


 
독특한 문화 코드를 갖춘 서울의 골목 상권들이 소비 문화의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 철공소를 리모델링해 공방과 이탈리아 음식점으로 탈바꿈시킨 영등포구 문래동의 가게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이번 분석은 서울지역 주요 상권의 2014∼2016년(매년 1∼11월)의 연평균 카드 사용액 및 결제 횟수 증가율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연령과 업종별 사용액 추이도 분석해 새로 뜨는 상권을 찾아내고 인기 있는 상권의 조건들을 살펴봤다.뜨는 강북 골목, 주춤한 도심·강남

 2010년대 이후 주목받기 시작한 서울 지역의 신흥 상권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강남보다는 강북에 위치한 곳이 많으며, 구도심의 저층 주택가나 노후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소규모 골목길 단위에서 주변 일대로 규모를 키우며 다른 곳과 차별화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용산구청 주변은 원래 백반집과 세탁소 정도가 자리한 주택가였다. 용산구 상권의 중심인 이태원역에서 서쪽에 위치해 상대적으로 발전도 더뎠다. 하지만 3, 4년 전부터 저렴한 임차료에 주목한 젊은 창업가들이 이곳을 찾으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이후 유동인구가 늘었고 상가 모습도 차츰 바뀌었다. 이태원을 상징하던 ‘빅 사이즈 옷가게’ 자리엔 가방과 액세서리를 파는 잡화점이 들어섰고 젊은층이 좋아하는 국수, 햄버거 가게도 생겼다. 상권의 콘텐츠가 다양해지면서 카드 매출은 최근 3년 새 연 평균 32% 이상 증가해 서울을 대표하는 25개 상권 중 매출 상승률 1위를 차지했다.

 서울을 대표하는 대학가 상권이자 공연문화 중심지로 자리매김한 홍대거리(연 평균 카드 매출 상승률·22.7%)가 뒤를 이었고, 삼청동(22.6%) 경리단길(17.4%) 등 강북 골목 상권이 대부분 상위권에 자리 잡았다.

 반면 기존에 서울을 대표하던 동대문(―4.0%)과 명동(―3.9%) 등 공룡 상권들은 매출이 오히려 줄었다. 개발 호재를 입은 잠실역과 코엑스의 성장세도 각각 0.7%, 8.9%로 서울 평균(9.7%)에 못 미쳤다. 한국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는 외국인 관광객이 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내국인 매출액이 물가만큼도 오르지 않은 건 의외의 결과다.

 부동산 업계 관계자들은 이들 상권이 최근 판교, 하남 등 수도권에 생긴 대형 쇼핑몰들에 손님들을 뺏겼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한다. 종각(9.4%) 등 서울 도심 유흥가 역시 차별화된 소비 콘텐츠를 들여오지 못하며 평균 아래로 성장세가 꺾였다.



‘SNS發 인기’가 핫 플레이스 필수조건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의 철공단지 골목길엔 매일 정오쯤 카메라를 목에 건 젊은이들이 모여든다. 이들은 공구점 사이에 숨은 공방들을 찾아다니거나 벽화 앞에 서서 포즈를 취한다. 삼삼오오 점심 산책을 나온 직장인들도 눈에 띈다. 낡은 철공소 골목에서 갤러리와 맛집이 어우러진 세련된 거리로 변신한 이곳은 2, 3년 전부터 ‘페이스북’ 등 SNS에서 입소문을 탄 문래예술촌이다.

 최근 서울에서 급부상한 인기 상권들의 공통점은 ‘SNS발(發) 인기’다. 과거의 이면도로 가게들은 운 좋게 방송 등의 매스컴을 타야 겨우 존재감을 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엔 ‘○○동 맛집’ ‘맛스타그램(맛집과 인스타그램의 합성어)’ 등의 해시태그(#)를 많이 다는 게 좋은 입지를 선점하는 것만큼 중요해졌다. SNS에서의 정보 전파 속도가 어떤 매체보다도 빠르기 때문이다. 선종필 상가뉴스레이다 대표는 “이태원 등지에서는 한 달이 멀다 하고 새로운 골목이 인기 상권으로 떠오를 만큼 상권의 변동 주기도 짧아졌다”고 설명했다.

 카페·레스토랑 등 맛집의 영향력이 부쩍 커진 점도 SNS 시대에 나타난 변화다. 백화점 같은 대형 몰이나 값비싼 물건을 파는 패션·잡화점이 상권을 개척하던 옛날과 달리 인기 있는 식당들이 뜨는 상권의 시작점이 되고 있다. 실제로 용산구청 상권의 음식점 매출액은 2014∼2016년 사이 120% 넘게 급증했다. 삼청동(54.0%), 서울대입구역(36.4%), 경리단길(34.1%)도 모두 맛집이 뜨면서 전체 상권의 매출이 늘어난 곳이다.

 황점상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코리아 대표는 “남들이 가보지 않은 장소의 사진과 방문 후기를 인터넷에 올려 자신의 개성을 어필하는 게 SNS 세대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이어 “음식과 디저트는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차별화된 소비 생활을 보이는 데 가장 적합한 아이템”이라고 분석했다.



“실력·개성 모두 갖춰야 뜬다”

 북촌으로 불리는 종로구 삼청·가회동은 이번 조사에서 카드 매출 성장률이 모두 10위 안에 들면서 최근의 뜨거운 인기가 매출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북악산 쪽 야트막한 언덕길 양쪽으로 늘어선 한옥 상가들이 이 동네들을 대표하는 풍경이다. 잘 보전된 옛 한옥 거리의 정취가 내·외국인 손님들의 발걸음을 이끄는 비결로 꼽힌다.

 북촌에서 5년째 피자 전문점을 하고 있는 김기웅 사장(39)은 “매장 규모는 명동 같은 도심에 비해 훨씬 작지만,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한옥 상점들은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명소”라고 소개했다.

 독특한 문화 코드는 요즘 뜨는 상권들이 갖춘 또 다른 특징이다. 수도권 대부분의 도시에 백화점이 들어선 오늘날, 소비자들은 자기 동네에서 찾을 수 없는 소비 환경을 체험하기 위해 기꺼이 발품을 판다. 천편일률적인 유명 브랜드 체인에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도 크게 늘었다.

 신흥 핫 플레이스들은 대부분 이런 고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 곳들이다. 최근 베트남 문화거리를 새로 조성한 이태원 상권, 옛 건물을 재활용해 복고풍의 분위기를 지키는 문래·성수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물론 창업자들로서는 품질과 개성을 동시에 고민해야 하는 과제가 생긴 셈이다. 급변하는 상권 지도 속에선 이들 상권 역시 ‘떡잎’ 단계에서 사그라들 가능성이 없지 않다. 특히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평가를 공유하는 소비자들은 예전보다 훨씬 깐깐한 심사위원이 됐다.

 윤덕환 마크로밀 엠브레인 이사는 “요즘 소비자들은 프랜차이즈 치킨집의 맛을 지점별로 구분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정보를 수집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콘텐츠만 좋으면 소자본 가게도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지만 실력과 개성을 갖추지 못한 매장은 빠르게 외면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뜨는 동네 앞에 놓인 숙제들

 유행에 민감한 20, 30대 이상의 연령대로 수요층을 넓히는 것도 신흥 상권들 앞에 놓인 숙제다. 온라인 입소문으로 상권 띄우는 건 2030세대의 몫이지만 높은 구매력으로 상권을 성숙시키는 건 4050 소비자들이기 때문이다. 최근 2년 동안의 매출액 증가율이 서울 평균에 못 미쳤던 종각 상권의 경우 40대 이상 소비층의 비율이 30%도 안 됐다. 경리단길 역시 이 비율이 36% 정도에 그쳤다. 상권이 완숙기로 접어든 것으로 평가되는 강남역 상권의 경우 40대 이상 소비층의 비율이 66.6%였다.

 무엇보다도 큰 걸림돌은 역시 임차료다. 대개 상권 조성 초기에는 개성 있는 소규모 가게들이 비교적 싼 월세에 점포를 꾸린다. 하지만 동네가 인기를 얻다 보면 매출보다 임차료가 빠르게 오르기 마련이다. 결국 대형 프랜차이즈만 살아남는 현상이 서울 곳곳에서 반복되는 것이다.

 2010년대 초반부터 급성장한 대부분의 신흥 상권이 현재 이러한 기로에 서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선종필 대표는 “인사동 상권의 경우 서울시가 나서 신규 입점 업종을 제한해 원래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문화적 가치를 고려한 상권 계획이 필요한 때다”라고 강조했다.

천호성 thousand@donga.com·강성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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