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의 역사속 한식]생강

황광해 음식평론가

입력 2016-11-02 03:00 수정 2016-11-23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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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해 음식평론가
 문제의 발단은 자그마한 ‘생강 선물’이었다. 태종 14년(1414년) 4월, 사헌부가 청원군 심종을 탄핵한다. 심종(?∼1418)은 태조 이성계의 차녀 경선공주의 남편이다. 태조의 부마이자 현직 국왕 태종의 매제다. 기록에는 “심종이 지난해 가을, 임금의 행렬을 따라 남쪽으로 갔을 때 방간이 몰래 보낸 생강을 받았고, 그 내용을 임금에게 아뢰지 않았다”고 했다.

 심종은 ‘제1차 왕자의 난’(1398년 8월) 때 방간, 방원의 편에 섰다. 이때 정도전, 남은 등이 제거된다. 정종이 즉위했다. 정종 2년(1400년) 1월,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방간과 방원의 싸움이다. 시쳇말로 ‘게임이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방간은 성질 급한 무인일 뿐 정략가는 아니었다. 어린 시절 같이 자란 동생이 실권자가 되니 어깃장을 놓아본 것일 뿐이다. 싸움은 간단히 끝난다.

 회안대군 방간은 여기저기 유배지를 옮기다가 결국 완산(전주)에 머무른다. 심종은 방간과 가까웠지만 ‘2차 왕자의 난’ 때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다. 줄을 잘 선 것이다. 심종은, 태종 이방원에게 미움을 받지 않고 벼슬을 유지한다. 사건은 심종이 태종을 따라서 호남 지방으로 갔을 때 일어난다.

 태종은 1413년 9월 충청도, 전라도 일대를 돌아본다. 이때 완산에 유배 중이던 회안대군 방간이 심종에게 생강을 선물한다. 태종 이방원 밑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지만 심종은 방간과 친분이 깊었다. 심종은 방간이 보낸 생강 선물을 덥석 받았다. 이게 화근이었다. 문제는 몰래 받았다는 것이다. 더하여 내용을 임금에게 솔직히 털어놓지 않았다.

 생강 선물 후 3년이 지났다. 태종 16년(1416년) 11월에는 ‘청원군 심종을 교하(경기도 파주)에 안치(安置)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조선왕조실록). 설명이 뒤따른다. ‘임금이 생강 선물을 알고 물었으나, 심종이 숨기고 고하지 않았다. 임금이 곧 죄를 가하지 않았는데, 심종이 일찍이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말하거나 웃기를 태연자약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었다.’

 그동안 심종에 대한 탄핵이 빗발친다. 탄핵 이유는 간단하다. 권력자 태종에 대한 아부다. 오죽하면 태종이 직접 나서서 “심종의 죄가 있다고 하나 죽을 만큼 큰 죄는 아니다. 유배를 보내기는 하나 목숨에 손을 대지 마라”고 특별히 지시한다.

 심종은 자원안치(自願安置)된다. 자원안치는 유배지를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유배형 중에서는 비교적 가볍다. 심종은 유배생활 끝에 태종 18년 3월, 토산현(황해도)에서 병으로 죽는다.

 생강 선물은 빌미일 뿐이다. 생강이 국왕의 매제를 유배 보낼 정도로 대단한 물건은 아니었다. 영조 시대 학자이자 관리였던 유수원(1694∼1755)의 ‘우서’에는 전주의 생강 상인 이야기가 나온다. 전주 생강은 유명했다. 심종은 전주 특산물 생강을 조금 받았을 뿐이다. 심종의 구체적인 죄는 사통(私通)이다. 심종은 ‘잠재적 쿠데타 가능 인물’인 방간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 매개체가 생강이었을 뿐이다. 별일 아니지만 문제 삼으면 별일이 된다. 생강이 사통으로 연결되고 역모의 징조가 된 것이다.

 생강은 단순한 식재료가 아니었다. 양념으로 사용했지만 약용으로 사용한 경우도 많았다. 중종 39년(1544년) 5월의 기록에는 세자가 동궁의 관원들에게 생강을 내리고 직접 글을 써서 내렸다는 구절이 있다. ‘논어에 공자께서 생강을 끊지 않고 먹었다고 했다. 구복(口腹)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신을 소통시키고 구취(口臭)를 제거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다.’(조선왕조실록) 논어 ‘향당편’에 나오는 내용이다. 구복은 ‘입맛’이다. 입맛을 위해 생강을 먹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맑게 하고 입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 먹는다는 내용이다.

 강계(薑桂)는 생강과 계피다. 나이 든 이들이 보양제로 먹었다. 생강, 꿀, 귤껍질 등을 섞은 차도 등장한다. 젊은이들에게는 생강을 권하지 않았다. 어린 사람이 생강을 먹으면 몸의 진기가 마른다고 믿었다. 단종은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왕좌에 올랐다. 즉위년인 1452년 12월의 기록에는 단종에게 생강을 권하지 않는 내용이 있다. ‘건강(乾薑)은 맛이 쓰고, 따뜻하며 열을 많이 낸다. 50세 이후의 기력이 쇠한 사람은 복용할 만하지만, 전하는 춘추가 장성해 가고 혈기도 성해져 가니 오히려 몸에 좋지 않다’는 내용이다. 10대 소년인 단종에게는 마른 생강이 오히려 해를 끼칠 수 있다는 뜻이다.
 
황광해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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