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진단]한진해운과 ‘치킨 게임’ 도미노

주성원 산업부 차장

입력 2016-09-05 03:00 수정 2016-09-0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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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원 산업부 차장
“이게 뭔지 알아? 치킨이라고 부르는 게임이야. 하지만 보통 버스로 하지는 않는다고.”

영화 ‘레드 히트’(1988년)의 대사 한 토막. 마약상을 잡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온 모스크바 경찰(아널드 슈워제네거)이 대형 버스를 몰며 범인이 탄 버스와 정면충돌하려고 하자 동승한 시카고 경찰(제임스 벌루시)이 비명을 지르면서 내뱉는 말이다.

요즘 자주 등장하는 ‘치킨 게임’이라는 용어는 1950년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던 일종의 담력 과시 경쟁에서 유래했다. 서로 마주 보고 차를 몰다 먼저 방향을 돌리는 쪽이 ‘치킨(겁쟁이)’이 되는 것이다.

제임스 딘 주연의 영화 ‘이유 없는 반항’(1955년)에는 두 젊은이가 벼랑을 향해 차를 몰고 가다 운전석에서 뛰어내리는 치킨 게임도 등장한다. 차를 마주 보고 몰든 벼랑을 향해 몰든, 이 게임에서 승부의 관건은 상대편보다 1초라도 더 오래 공포를 견디는 것이다.

경제에서는 손해를 감수하고 과도한 가격 인하 경쟁을 벌이는 기업 간 경쟁을 의미한다. 차이가 있다면 경쟁에서 지는 기업은 ‘겁쟁이’가 되는 정도가 아니라 ‘사망’에 이른다는 점이다. 실제로 2002년부터 2009년까지 진행된 반도체 치킨 게임에서 삼성전자와 하이닉스(현 SK하이닉스)의 가격 인하 공세에 밀린 독일 키몬다가 2009년 파산했다.

한진해운 법정관리 사태도 글로벌 해운업계가 숨 막히게 벌여온 치킨 게임의 결과물이다. 한국 해운업은 아노미에 빠졌지만 해운 시장은 냉정했다. 화주들이 한진해운을 대체할 새 해운사를 찾으면서 해운 운임은 폭등했다. 외국 해운사들이 한진해운 난항의 반사이익을 보고 있는 반면, 국적선사를 이용하던 한국 수출입 기업들은 업무 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해운업 치킨 게임을 주도한 것은 세계 1위 해운사인 덴마크의 머스크 라인이다. 선박 600여 척을 운용하는 머스크는 규모의 경제를 앞세워 운임을 낮췄다. 공급 과잉에 몰린 경쟁사들은 머스크를 따라가기 위해 원가 이하 운임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머스크가 경쟁력을 확보하게 된 배경이다. 1904년 출범한 머스크는 100년 가까이 전 세계 지역 영업망의 역량에 의존한 성장 중심 경영을 펼쳤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서 ‘스타라이트’(2002년)와 ‘스트림라인’(2008년)이라는 두 차례의 조직 개편 프로젝트를 시행하며 본사와 지역 본부 역할을 강화한 성과 중심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이 과정에서 머스크는 선제적인 구조조정을 통해 수익성과 효율성을 확보했다. 해운 호황기에 불황을 대비한 머스크의 혁신 전략은 결과적으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진해운 사태만으로도 한국 산업계가 입은 피해는 막대하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산업 분야 곳곳에서 이와 비슷한 글로벌 치킨 게임이 진행 중이라는 데 있다. 중국발 공급 과잉이 촉발한 제조업 분야가 가장 심각하다. 당장 철강과 디스플레이, 배터리 등에서 본격적인 출혈 경쟁이 벌어지고 있거나, 조만간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바야흐로 ‘치킨 게임 도미노’가 펼쳐지는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 기업 중 머스크처럼 이 상황을 준비해온 기업은 얼마나 될까. 게임에서 승리할 만한 경쟁력을 가진 기업은 어디일까. 또 정부는 치킨 게임 도미노에 대비한 정책과 대안이 있을까.

한진해운 사태로 새삼스럽게 곱씹게 되는 질문이다. 산업계 여러 분야에서 반면교사가 필요한 시점이다.

주성원 산업부 차장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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