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로 둔갑한 고품질 인쇄물

손택균기자

입력 2016-07-19 03:00 수정 2016-11-23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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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국내 미술관들 유명작가 작품의 오프셋 인쇄물을 진품인 것처럼 관객에 소개
작가의 보증 뜻하는 AP 표시했지만 사실은 복제품 제작자의 보증


김환기(위 사진)와 김창열의 작품을 복제한 것. 이 외에도 박수근의 그림을 포함한 복제 이미지 수십 점을 원본 작품에 대한 설명도 없이 전시실에 걸어 놓았다.
“액자 하단에 연필로 표기한 숫자가 있죠? ‘478/500’이라면 총 500장 찍은 것 중 478번째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표기가 없는 건 ‘가짜’입니다.”

17일 오후 경남 창원의 한 사설 미술관. 학예연구사 A 씨가 그림 구석구석을 유심히 살피는 기자에게 다가와 명함을 건네며 설명했다.

전시 타이틀은 ‘판화로 보는 한국의 거장들’. 벽면에는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김창열 이우환 장욱진 등 유명 작가들의 판화 80점을 미술관 개관 전에 특별히 기획 제작해 수집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이중섭의 유채화 ‘흰 소’(1954년경)를 복제한 전시품. 원본의 사진 이미지를 잉크로 인쇄한 것인데 ‘판화 작품’이라며 그림 옆 메모에 ‘AP(artist proof)’라는 표기까지 해놓았다. 크기도 진품 그림과 동일하다. 창원=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1954년경 완성된 이중섭의 대표작 ‘흰 소’ 곁에는 ‘이중섭, 흰 소, AP, lithograph(석판화), 2014년 제작’이라는 메모를 달았다. A 씨는 “AP는 ‘artist proof’의 약자다. 작가가 특별히 제한적으로 만든 작품이라는 의미다. 원화 이미지의 저작권을 보유한 각 재단에서 제작한 것을 구매했다”고 말했다.

여기서 학예사가 언급한 ‘작가’는 화가 이중섭이 아니다. 복제품 제작자를 ‘진품 보증 작가’로 여긴 셈이다. 그러나 이곳의 모든 전시품은 진품이니 아니니 따질 필요도 없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쇄물일 뿐이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 유명 미술관 아트숍에서 10만∼30만 원에 판매하는 기념품 인쇄물과 동일한 종류다. 박수근의 ‘노상’, 김환기의 ‘산호섬을 나는 새’ 등의 복제본도 같은 방식으로 걸어놓았다.

잉크로 인쇄한 복제 이미지 상품을 미술관에서 ‘작품’이라고 전시하는 사례는 여기뿐이 아니다. 강원 고성군, 전북 무주군의 공립 미술관에도 이와 같은 인쇄 복제품이 전시돼 있다. 미술평론가 정준모 씨는 이런 행태에 대해 “오프셋(offset) 인쇄와 석판화를 얼렁뚱땅 같은 것으로 치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석판화 기법은 원판에 물리적 굴곡을 주지 않고 물과 기름의 반발력을 이용한다. 정교하고 부드러운 표현이 가능해 고야, 로트레크, 피카소 등이 즐겨 사용했다. 오프셋 인쇄는 석판화와 원리는 같지만 컴퓨터 그래픽 프로그램이 작가의 수작업을 대신한다. 그 결과물은 디테일 표현이 뛰어난 고급 인쇄물일 뿐 작품이라 할 수 없다.

창원 미술관 학예사의 ‘AP’에 대한 설명에도 오류가 있다. 이것은 판화와 사진 등 같은 이미지를 여러 장 생산하는 작품에 대해 작가가 제한적으로 붙이는 표기다. 여기서 ‘작가’란 당연히 원형 이미지를 만들어낸 이를 뜻한다.

이런 개념의 오해를 가볍게만 여길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5월 열린 미국박물관협회 엑스포에서 한 미술품 복제업체는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에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진품 대신 걸 수 있는 ‘클론’을 당장 제공할 수 있다”고 밝혀 이목을 끌었다. 한 공립 미술관 학예사는 “훼손 상태까지 그대로 베껴 만들어 육안으로 구별할 수 없는 복제품이 많아질수록 ‘작가의 노동’에 대한 가치관을 거듭 고민하게 된다”고 말했다.

창원=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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