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2인자는 1인자의 ‘충성스러운 반대당’이 돼라

고승연 기자 ,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입력 2016-07-04 03:00 수정 2016-07-0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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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회에서 재상은 독특한 위치의 2인자였다. 형식적인 서열은 2인자이지만 그들에게 부여된 책무는 1인자나 다름없었다. 이는 세습 군주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재상에게 국가 경영의 실질적인 책임자 역할을 맡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재상 위에는 그에 대한 임면권뿐 아니라 생살여탈권까지 쥐고 있는 절대군주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권이 약했던 시대조차 임금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재상의 목숨을 거둘 수 있었다. 1인자의 규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고 이는 재상의 행동반경을 제약했다. 재상의 성공과 실패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 얼마나 현명하게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조선시대 임금과 재상의 관계는 사실 현 시대 기업의 오너와 전문 경영인 구도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오늘날의 2인자들에게 주는 시사점이 클 수밖에 없다. DBR(동아비즈니스리뷰) 203호(6월2호)에는 조선시대 재상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2인자의 성공 전략을 분석한 기사가 실렸다. 주요 내용을 요약한다.


○ 1인자의 뜻에 부합하라

아무리 재상이 뛰어나고 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임금에 의해 ‘위임’된 힘이다. 어떤 경우라도 재상권의 절차적 정당성은 임금에게서 나온다. 따라서 재상이 자신의 경륜을 맘껏 펼치려면 임금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조준(1346∼1405)과 하륜(1347∼1416)의 처세 방식은 현 시대 2인자들에게도 큰 교훈을 준다. 두 사람은 왕권에 도전하지 않겠다는 뜻을 끊임없이 피력했다. 권력과 관련된 일에는 우유부단하게 행동하고 스스로 약점을 노출함으로써 태종의 의심을 완화시켰다. 그러면서 조세 개혁, 제도 개편, 왕권 강화 등 태종의 지시 사항을 완수하는 일에 매진한다. 이들은 자체 어젠다를 실천하기보다는 임금이 추진하는 목표 안에서 소임을 찾았다.

신숙주(1417∼1475)도 항상 겸손하게 행동하며 세조에게 부담이 가는 일은 본인이 나서 처리하되 자신의 이상도 함께 실현했다. 2인자는 이미 많은 권한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1인자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더라도 잠재적인 경쟁자로 간주될 수 있다. 하지만 1인자가 상처받을 수 있는 일을 자발적으로 떠안으면 군주의 신임을 받을 수 있으며 자신의 행동반경도 커질 수 있다.


○ 임금(1인자)의 잘못을 바로잡는다.

재상에게 주어지는 핵심 책무는 사실 왕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1인자는 ‘간언’, ‘극간’을 자신에 대한 거역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2인자는 이로 인해 큰 위기를 겪을 수 있다. 직장에서 팀장이 임원에게 반기를 들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대부분의 조직에서 타당한 내용이라 하더라도 상사에게 반기를 들기는 무척 힘들다. 하지만 1인자의 결정이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리고 구성원들에게 피해를 준다면 2인자는 주저하지 말고 나서야 한다.

정광필(1462∼1538)은 중종이 절차를 무시한 채 음모를 꾸며 조광조 등을 숙청하려 하자 강경하게 맞섰다. 임금이 공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신하를 죽이려는 나라에선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정광필은 연일 중종에게 극간을 멈추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 역시 연로한 나이에 귀양을 가고 힘든 고난을 겪어야 했지만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이처럼 ‘극간’의 단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재상은 평상시에 임금의 ‘위대한 반대자’, ‘충성스러운 반대당’이 돼야 한다. 허조(1369∼1439)는 세종의 거의 모든 조치를 반대하고 소수의견을 냈는데 이로 인해 세종시대 정책의 완결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온갖 경영서적마다 CEO들에게 ‘악마의 변호인’을 두라고 조언하는 것과 조선시대 재상의 ‘간언’에 대한 강조는 사실상 같은 얘기다.


○ 압도적인 신뢰 자본을 쌓는다

앞서 언급한 ‘간언’과 ‘충성스러운 반대자’의 역할은 사실 1인자가 세종과 같은 성군이나 돼야 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면전에서 자신의 잘못을 지적받으면, 순간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는 정조의 고백처럼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비판을 기꺼이 용납하기란 쉽지 않다. 결국 인정하고 고치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언짢을 수 있다. 더군다나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1인자라면 간언한 2인자를 내쫓거나 심지어 응징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2인자가 자신의 책무를 다하려면 평소에 신뢰 자본을 충분히 쌓아야 한다. 선조, 광해군, 인조 삼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이원익(1547∼1634)이 그랬다. 이원익은 이순신이 억울하게 잡혀갈 때 끝까지 변호하며 “대사를 끝장내려 하느냐”고 선조를 비판했고 임해군 처벌, 인목대비 폐비 등 광해군의 조치에 대항했으며 인조에게도 끊임없이 간언을 올렸다. 백성의 절대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왕권에 위협이 될 수도 있었지만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자신의 안위에 신경 쓰지 않고 앞장섰기에 ‘진정성’을 인정받았다.


○ 대체 불가능한 영역을 구축한다.


2인자인 재상이 임금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바로 ‘대체 불가능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성과를 내는 것이다. 효종 때 영의정이자 ‘미스터 대동법’으로 불린 김육(1580∼1658)은 2인자로서는 단점이 많은 인물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사회가 당면한 현실에 대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했고 자신의 해결책을 갖고 있었으며 행정가로서 실무 능력도 뛰어났다. 왕이나 주변 신하들이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이유다.

유성룡(1542∼1607)과 최명길(1586∼1647)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거대 전쟁의 참화 속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당파 싸움과 유혈 보복의 악순환을 종식시키고자 했던 남구만(1629∼1711), 국가 리스크 관리의 귀재 정태화(1602∼1673), 정조의 정치 비전을 충실히 뒷받침한 채제공(1720∼1799) 등은 다른 재상으로 대체할 수 없는 능력과 역할이 있었기에 자신만의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2인자의 자리는 위태롭고 2인자의 업무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것이 2인자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임무가 추상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다양한 일에 참여할 수 있고 자신만의 뜻을 펼칠 수도 있다. 이 시대의 수많은 2인자가 조선 재상들의 성공과 실패를 보며 자신만의 비전을 펼칠 방법을 찾기를 기대해 본다.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e@skku.edu
정리=고승연 기자 seank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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