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의 노래와 경북 고령

여성동아

입력 2016-06-22 10:33 수정 2016-11-23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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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줄 남아 있지 않은 사료에서 출발한 작가의 상상력은 대가야의 몰락을 전후로 한 시간과 인물들 사이에 무수히 많은 층을 창조하며 이를 사실감 넘치는 소설로 빚어냈다. 그리고 그 층층이 담아낸 이야기들은 땅의 주인이 되기 위해 다듬어지는 쇠와, 덧없이 사라지는 듯하지만 새롭게 살아날 수도 있는 소리의 운명을 대비시키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왕국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쇠와 소리로 남은 왕국, 가야

대가야(혹은 금관가야로도 추정할 수 있는)의 운명이 신라의 칼날 아래 서서히 기울어가던 어느 시절, 이제 인간의 기본적인 생리 현상마저 시녀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할 정도로 노쇠한 대가야의 가실왕은 자신의 명이 다해가고 있음을 직감하고 마지막 가는 길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오랜 시간 그를 보필한 집사장은 당시 왕의 장례법이었던 순장을 치르기 위해 가실왕과 함께 묻힐 가신과 백성, 왕을 모시던 시녀들을 선발하고 장지를 살피는 등의 절차에 착수했다. 그 엄숙한 장례식에는 왕실의 예식을 늘 거들었던 악사, 우륵의 연주가 예정되었다. 역사적으로는 가실왕의 명을 받아 가야금 12곡을 완성했다고 알려진, 가야금의 시조이자 악성으로 평가받는 그 우륵이었다. 그러나 가실왕의 장례에 쓰일 여러 ‘고을의 소리’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집사장의 다그침에 그의 마음은 회의감으로 가득 찼다. 가야의 온 고을이 이웃한 강국 신라와 백제의 틈바구니에 끼어 말발굽 아래서 신음하는 때에, 능침의 평안과 고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음악이라니. 가야의 녹을 받는 우륵으로서는 그런 말들을 그저 삼켜둘 수밖에 없었다.

왕이 마침내 숨을 거둔 뒤 그의 저승길에 동행시킬 여러 부류의 백성들이 고을별로 선발되어 오고, 왕을 시중들던 지밀 시녀들을 포함한 순장자들도 속속 집결된다. 그런데 순장자로 지목된 시녀들 중 한 명이 사라지는 ‘불경스러운’ 일이 벌어진다. 누구보다 왕의 가장 가까이서 시중을 들었던 여인 아라였다. 목숨에 대한 강한 애착을 느낀 나머지 왕궁의 수로를 통해 탈출한 아라는 우여곡절 끝에 철제 무기 제조를 담당하던 야로(가야의 멸망을 내다보고 오히려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신라에 바치며 변절한 인물이다)를 거쳐 우륵에게 찾아들고, 왕의 장례는 아라 대신 다른 시녀를 순장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한편 고을 곳곳을 다니며 새롭고 온전한 악기를 만들어 자신의 소리를 완성하려던 우륵은 칼(쇠) 아래 피폐해진 가야에서는 더 이상 소리를 완성할 수 없음을 깨닫고 고국을 떠나 신라에 투항한다. 그리고 우륵은 이 소리를 이을 수 있도록 권력의 주변이 아닌 작은 고을로 보내줄 것을 장군 이사부에게 청하지만, 훗날 정복지를 시찰하러 하림궁으로 나선 행차에서 그의 음악에 크게 감동한 신라 진흥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기에 이른다.

그러는 와중에 아라는 죽음의 운명을 피하지 못하고 연주가 끝난 후의 소리처럼 스러져간다. 순장의 대열에서 탈출했지만 결국 집사장에게 붙잡혀 가실왕의 뒤를 이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은 태자와 함께 묻힌 것. 우륵의 여인이었던 비화 역시 뱀에 물려 세상을 떠나고, 정복 전쟁의 선봉에 있던 장군 이사부도 전쟁터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 우륵도 신라의 악사로 살아가다가 소리를 남기고 숨을 거둔다. 우륵의 제자 니문만이 홀로 남아 가야의 이곳저곳을 걸인처럼 떠돌다 일흔 살이 넘은 어느 가을날, 불타 검은 재만 나뒹구는 옛 가야의 궁궐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이자 아라가 함께 묻힌 태자의 무덤 앞에서 옛 가야의 네 줄짜리 금을 처연히 뜯는다.



유려한 문장 속에서 살아난 가야와 가야의 소리

합천, 함창 등과 더불어 대가야의 거점이 되었던 경북 고령. 상당한 양의 가야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는 곳이라 〈현의 노래〉와 함께 시간 여행을 떠나기에 그만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일부에 남은 짧은 사료들로 전해지는 가야의 악성 우륵을 주인공으로 그의 삶, 그리고 삼국의 끊임없는 정복 전쟁을 이끌었던 무기(쇠)와 소리의 의미를 풍부한 상상력으로 써내려간 소설 〈현의 노래〉가 2004년 출간되었을 때, 독자들은 전작 〈칼의 노래〉와는 또 다른 방식의 역사 해석을 펼친 작가 김훈의 능력에 찬사를 쏟아냈다. 〈칼의 노래〉가 영웅의 이미지에 가둬두었던 이순신의 인간적인 내면을 칼날 같은 문체로 해부하며 충격을 줬다면, 〈현의 노래〉는 가야금을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악성 우륵과 그를 둘러싼 역사와 인물들을 유려하면서도 화려한 문장들로 되살려낸 것이다.

특히, 인물이나 풍경, 정황을 설명하는 데 있어 동일한 대상이라도 상반되는 의미의 수식을 나열하되 그 모든 수식들이 저마다의 깊은 뜻을 품은 문장들은, 몇 번을 곱씹어 읽으며 제맛을 음미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와 상황 묘사들 역시 그 의미를 허투루 넘길 수 없는 것들이어서 한번 책장을 펼친 뒤 쉬 덮지 못하는 힘을 지녔다. 일면 장황해 보일 수 있는 문체지만 그럼에도 완벽하게 지어진 집 한 채를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그야말로 ‘읽는 즐거움’을 가득 전하는 소설이다. 마치 소설 전체가 곡조를 읊조리는 듯하다는 평론도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특히 갖은 소리에 대한 묘사에 많은 공을 들이고, 치밀하게 그 소리가 생기고 사라지는 순간을 써내려간 부분에서는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흥을 발견할 것이다.

작품은 562년 멸망했다고 전해지는 대가야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웃하는 강국인 신라와 백제가 강력한 통일 국가 체제를 이룬 것과 달리 12개로 나뉜 부족들, 즉 소왕국들의 연합체로 존재했던 가야가 한때 신라와 백제를 위협할 정도로 힘을 키웠던 바탕에는 뛰어난 철기 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작가는 〈현의 노래〉를 통해 이 ‘쇠’가 고을을 정복하는 도구로 다듬어지고 더 강한 주인의 손을 거치며 더욱 날카롭고 잔인한 무기로 태어나는 등 권력의 상징으로 묘사한 것과 달리, 소리는 주인이 있을 수도 없고 연주를 멈추는 순간 절로 소멸하지만 폐허가 된 땅에서도 새로이 살아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둘이 다르지 않음을, 둘 중 그 어느 것이 더 낫거나 못함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죽음이 이 쇠와 소리처럼 덧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있음을 표현한다. 작가가 서문에서 “악기가 아름답고 무기가 추악한 것이 아니다. 무기가 강력하고 악기가 허약한 것도 아니며, 그 반대도 아닐 것이다”라고 한 말이 이를 함축하고 있다.

이 소설의 또 다른 즐거움은 신라와 백제, 고구려의 역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남아 있는 자료가 부족한 가야의 이야기를 새로운 접근법으로 만나게 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소설 전반부에서 한참을 할애한 순장에 대한 묘사는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는 것이 가히 충격적이기까지 할 만큼 그 어디서도 보기 힘든 섬세함이 돋보인다. 물론, 주요한 인물들과 사건들은 역사의 큰 흐름을 따르고는 있지만, 가야금의 탄생을 두고 당나라 악기인 쟁(箏)을 개조해 가야의 악기를 만들라는 가실왕의 명에 따라 우륵이 만들었다거나, 가실왕과 더불어 우륵이 가야금 12곡(12부족 연맹체인 가야를 상징하듯)을 완성했다는 기존의 사료와는 사뭇 다른 소설 속 정황과 시간 안배에는 독자들의 이견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굳이 작가가 펼쳐낸 상상의 향연을 마다할 필요는 없을 듯하며, 어쩌면 다시 한 번 가야의 역사를 뒤적이며 들여다보게 했다는 점에 의미를 둬도 좋을 듯하다.


죽은 이에 허락된 안식처가 증언하는 대가야의 역사
주산의 능선을 따라 크기와 모양도 조금씩 다른 수많은 고분들이 흩뿌려지듯 자리하고 있다.

경북 고령은 가야산을 중심으로 인근 합천, 함창 등과 더불어 가야, 특히 대가야의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그런 만큼 김해, 합천 등과 비교해도 상당한 양의 가야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는 곳이라 이를 주제로 한 공간들을 따라 시간 여행을 떠나보기에 그만이다. 또한, 소설 〈현의 노래〉에서 가장 비중 있는 등장인물인 우륵의 흔적이 가장 뚜렷하게 남은 곳이자, 야로의 철제 병장기가 만들어지고 배에 실려 가야의 고을과 신라로 전해졌던 개포나루도 고령에 속해 있기에 오늘 떠나는 문학 여행의 목적지로 잘 맞아떨어진다.

대가야의 흔적을 찾아온 고령 여행의 첫 도착지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순장이라는 가슴 서늘한 관습으로 허물고자 했던 가야 왕들이 잠든 지산동 고분군이다. 이 여행은 주산(해발 310m) 자락에서 시작된다. 지산동 고분군은 고령 IC를 빠져나와 33번 국도를 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능선을 따라 불쑥불쑥 솟아오른, 크기와 모양도 조금씩 다른 수많은 고분들이 흩뿌려지듯 자리한 광경은 경이롭다. 고도상 가장 높은 능선 위에는 지름 20m가 넘는 대형 고분들이, 그 아래 고령읍 방향으로 뻗어 내려가는 산세를 따라 중형 고분들과 소형 고분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렇게 놓인 고분의 수가 무려 200여 기. 일부 학자들은 실제 이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만큼 규모는 거대하고 또 집약적이다.

대가야의 실체를 정확히 짚어내려는 갈증을 해소하기에는 부족한 터에 이 고분들 가운데 일부를 발굴하면서 얻게 된 껴묻거리(부장품)와 순장 등 당시 풍습의 흔적들은 의미 있는 사료가 되었다. 5백 년 넘게 지속되었던 왕조로 알려져 있음에도 겨우 대여섯 왕의 이름만이 전해졌던 대가야의 존재가 신비감을 벗고 조금 더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굽이치는 능선에 서서 좌우의 고분들을 둘러보는 동안 묘한 신비로움이 주위에 내려앉은 듯한 경험은 이곳 지산동 고분군이 간직한 1천5백 년의 시간과 만나는 즐거움이다. 고분 사이를 거닐다 문득 눈을 돌려 산 아래를 멀리 바라보면 고령읍이 한눈에 잡힌다. 〈현의 노래〉에서 묘사된, 왕의 죽음을 준비하는 이들이나 순장자들의 시선이 산 아래 마을로 향했던 정황과 맞아떨어지는 듯해 짧은 탄식이 절로 터진다. 죽은 왕을 모시기 위해 함께 묻혀야 했으며, 행여 왕의 평안을 방해할까 울음소리 한마디 내지 못했던 그들의 마음을 애써 헤아려보느라 고분 자락에 머문 걸음이 한동안 떼어지지 않는다.

1 가야왕과 순장자들이 안치되었던 곳을 복원해놓은 대가야왕릉전시관. 2 우륵의 흔적이 가장 뚜렷하게 남아있는 곳이자, 야로의 철제 병장기가 만들어지고 배에 실려 가야의 고을과 신라로 전해졌던 개포나루. 3 우륵박물관에 전시된 우륵의 흉상.όό

지산동 고분군을 거닐다 내려오면 대가야왕릉전시관에서 더욱 생생한 옛 왕국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지산동 고분군의 여러 무덤들은 1977년경에야 학술적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미 훼손된 고분들이 많았던 터라 때늦은 발굴이긴 했지만 특히 주산 구릉 맨 꼭대기에서 이 고분군의 좌장 역할을 하듯, 우뚝 솟아 있는 44호 고분은 학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주인공이었다. 5기의 대형 고분들 가운데서도 그 존재감이 두드러졌던 44호 고분의 실제 크기와 모양에 맞춰 대가야왕릉전시관은 지어졌다. 그러니까 전시관으로 입장하는 순간은 곧 44호 고분의 내부로 들어서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최소한의 빛만을 허락한 어둠침침한 전시관의 분위기도 이와 합을 맞춘 듯하다. 대가야를 지배했던 어느 왕의 마지막 휴식처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는 긴장감은 따로 말할 필요조차 없다.

44호 고분은 지름 27m, 높이 6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였는데, 3기의 대형 돌방과 이 돌방을 둘러싸듯이 배치된 32기의 소형 돌덧널무덤(바닥에 돌판을 깔고 그 위에 나무널을 넣어 만든 무덤)들이 있으니 최소 35기(혹은 이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의 무덤이 이 고분 안에 들어서 있던 셈이다. 학자들의 관심은 32기의 소형 무덤들의 정체에 몰렸고, 결국 이는 우리나라 최초로 대규모 순장을 확인해주는 증거로 판명되기에 이르렀다.

이 순장의 여러 형태와 의미 등을 전하고자 왕과 순장자들이 안치되었던 곳들을 복원했는가 하면, 인체 모형 등을 동원해 사실감을 높이고 있다. 관람객들은 원형의 무덤을 따라가거나 중간에 무덤 위로 뻗어놓은 발코니에 서서 이 무덤의 구조를 좀 더 상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그리고 관람로를 따라 44호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금귀걸이, 금동그릇, 은장식쇠창, 야광조개국자 등이 번성했던 대가야의 문화와 해외 교역 등을 현대인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대가야왕릉전시관과 이웃한 대가야역사관은 왕조의 태동과 멸망, 그리고 그 이후 고령 지역의 모습 등을 다양한 유물과 시각 자료로 모아놓아 함께 둘러볼 만하다. 왕조의 성립 때부터 이미 고령의 질 좋은 흙과 풍부한 철광석을 이용해 여러 토기와 생활 도구, 무기류 등을 만들었던 대가야의 기술과 문화가 생생히 전해질 것이다.

〈현의 노래〉와 함께하는 문학 여행에서 우륵의 흔적을 놓칠 수는 없을 터. 가야의 철학과 천문의 이치를 담아 독창성 넘치는 가야금을 만들고 많은 곡조를 지은 고대사 최고의 음악가인 우륵의 고향은 여러 곳으로 추측되었지만 고령군 고령읍 쾌빈리가 맞다는 설이 가장 힘을 얻었다. 그리고 그를 기리는 우륵박물관이 바로 쾌빈리에 세워져 있어 이곳으로 여정을 이어갔다.

가야금을 뉘어놓은 듯한 독특한 외관이 잠시 시선을 묶어두는 우륵박물관에 들어서면 우륵의 흉상(사실 정확한 생김새는 전하지 않는다)과 그가 가야금을 연주하는 모습을 담은 부조가 관람객들을 먼저 맞이한다. 이곳은 우륵의 생애와 음악적 업적, 그가 활동하던 당시의 대가야와 주변 가야 세력들의 관계 등을 설명하고 관련 유물, 유적 등을 전시한 공간이다. 이곳에서 가야금을 만들어 소리로 가야의 여러 세력을 통합하려 했다는 가실왕과 우륵의 절박한 꿈은 소설을 벗어나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어 성큼 다가올 것이다. 아울러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 가야금의 변천을 실제 악기를 통해 설명하고 옛 가야금 악보와 고분 등에서 출토된 가야금의 복원물 등으로 1천5백 년 음악사를 차근차근 일러준다. 우륵과 그의 업적에만 치우치지 않고 우리나라 가야금 음악과 역사 전반에 대한 소개도 잊지 않아, 역대 가야금 명인을 알리거나 가야금 연주 강습 등의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데도 힘쓰고 있다.

박물관을 나오면 그 뒤로 가얏고 마을이 이어진다. 이곳에서는 가야금 연주를 배우거나 가야금을 직접 만들어보는 매력적인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고, 아울러 다채로운 농촌 문화 체험도 준비하고 있다. 또한, 가얏고 마을은 우륵이 가야금을 손수 만들었던 곳으로 알려져 그 의미를 더한다.


Travel Information
1. 고령 찾아가기
서울이나 부산 등에서 출발할 경우 경부고속도로나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 서대구와 옥포 분기점을 거쳐 광주대구고속도로(옛 88고속도로)를 타고 고령 IC에서 빠져나온다.

2. 박물관 찾아가기
대가야왕릉전시관과 대가야역사관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대가야로 1203 /
054-950-7103
우륵박물관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가야금길 98 / 054-950-6789

3. 박물관 통합 이용 정보
관람 시간 09:00~18:00
관람료 성인 2천원 / 청소년 1천5백원(관람권 한 장으로 대가야역사관, 대가야왕릉전시관, 우륵박물관 모두 관람 가능)
휴관일 매주 월요일
문의 054-950-7103 www.daegaya.net

글&사진 · 남기환 | 디자인 · 유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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