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활의 시장과 자유]‘비자금의 덫’ 걸린 롯데, 큰 칼 빼든 검찰

권순활 논설위원

입력 2016-06-15 03:00 수정 2016-06-1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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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활 논설위원
전두환 정부 말엽인 1987년 범양상선 불법 외화유출 사건이 터졌다. 1조 원의 부채에 시달리던 범양상선의 박건석 회장이 1800만 달러(당시 환율로 150억 원)를 해외로 빼돌린 사건이었다. ‘해운왕’으로 불리던 박 회장은 국세청 조사와 검찰 수사가 이어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국세청이 세무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비자금이란 용어가 선을 보였다. 범양상선은 운항수입 누락과 경비 과다 계상 등의 수법으로 검은돈을 마련했다. 이런 자금은 기업의 공식 장부인 A장부에는 기재하지 않고 비밀 장부인 B장부를 만들어 관리했다. B장부의 B가 비밀의 비(秘)와 발음이 같은 것도 비자금이란 말의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


비자금은 구시대적 기업범죄


비자금이란 용어가 등장한 뒤 30년간 삼성 현대자동차 SK 두산 효성 등 많은 기업이 ‘비자금의 덫’에 걸려 곤욕을 치렀다. 과거의 잘못된 기업 관행에서 축적된 선대(先代)의 비자금을 정리하지 못했다가 문제가 불거진 사례도 적지 않았다. 상당수 기업인이 사법 처리됐지만 오랜 족쇄에서 벗어나 경영 투명성을 높이는 역설적 효과도 나타났다.

재계 5위인 롯데의 불법 비자금 조성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이 어제 계열사 등 15곳을 2차 압수수색했다. 신동빈 회장과 신격호 총괄회장의 집무실과 자택, 계열사 등 17곳을 압수수색한 지 나흘 만의 추가 수색이다. 핵심 실세인 그룹 정책본부의 이인원 본부장(부회장), 황각규 운영실장(사장), 소진세 대외협력단장(사장), 계열사 대표들도 잠재적 피의자 리스트에 올랐다. 서울중앙지검이 ‘큰 칼’을 빼들고 저 정도의 전방위 수사에 나섰다면 범죄 혐의를 입증할 구체적 근거를 상당히 확보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기업 오너들은 회삿돈을 빼먹는 임직원을 가장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 총수 일가는 더하면 더했지 예외일 수 없다. 롯데 수사가 기업과 협력업체, 임직원들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안타깝지만 구시대적 비자금 조성이 확인되면 경제적 후유증이 따르더라도 엄단해야 한다. 명백한 불법과 비리를 기업인이 저지르고도 법망을 빠져나간다면 ‘건강한 시장경제’도 공허해진다.

수사가 속도를 내면서 검찰이 확인되지 않은 의혹을 흘리거나 속보 경쟁을 벌이는 언론이 실체적 진실과 다를 수도 있는 보도를 여과 없이 쏟아내는 조짐도 보인다. 불법 비자금 조성은 응징해야 하지만 주주로서 정당하게 수령한 배당금까지 횡령이나 국부(國富) 유출로 몰아가선 안 된다. 제2롯데월드 인허가 문제도 이명박 정부 인사들에게 검은돈이 실제로 건네졌다면 몰라도 인허가 자체가 잘못이며 불법 로비가 당연히 존재했다고 예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아직 표면화하진 않았지만 신 회장 부자와 대부분의 국내 전문경영인의 발목이 잡히면서 일본 롯데홀딩스의 쓰쿠다 다카유키 사장이 한국 롯데에도 영향력을 키울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것도 가볍게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포스코 수사’ 무리수 반복 말라


검찰의 포스코 수사가 100일을 넘긴 작년 7월 나는 이 칼럼에서 칼을 뺀 이상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큰 건(件)을 해야 한다는 식의 무리한 수사 행태를 우려했다. 그로부터도 다섯 달이나 더 포스코를 족친 수사는 결국 용두사미로 끝났지만 포스코의 대외 이미지는 추락했고 아직도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번에도 롯데의 혐의를 신속하게 밝혀 환부를 도려내지 못하고 시간만 질질 끌며 기업을 골병들게 만드는 잘못을 반복한다면 검찰의 역량과 수사 행태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커질 것이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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