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슨, 3억명 질병정보 확보… 한국선 법에 막혀 손도 못대

곽도영기자 , 정세진기자

입력 2016-05-17 03:00 수정 2016-05-1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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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데이터 후진국’ 한국]<上>‘데이터 산업’ 발목잡는 규제

올해 2월 IBM은 26억 달러(약 3조664억 원)에 ‘트루벤헬스애널리틱스’라는 데이터 분석 회사를 인수했다. 미국 뉴욕의 병원에서 전문의와 함께 암을 진단하는 인공지능(AI)인 왓슨은 이번 인수로 모두 3억 명의 환자 데이터를 확보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왓슨의 각종 암 진단 정확도가 90%를 넘은 상황에서 인간 최고 전문의를 뛰어넘는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현실화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 같은 데이터 수집 및 활용이 의료법에 막혀 있다. 의료법에 따르면 의료 기업이 개인의 동의를 받더라도 온라인을 통해 의료 정보 데이터를 받을 수 없다. 환자 개인이 일일이 자신이 다닌 병원을 돌아다니면서 종이나 CD 형태로 정보를 얻어 이를 기업에 건네야 한다.

의료업계 관계자는 “수년 뒤 AI를 이용한 진료가 본격화되면 한국 기업의 서비스가 아니라 IBM의 왓슨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IBM은 환자 개개인의 병명과 치료 정보, 보험 정보를 활용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개인의 유전자 데이터를 분석해 치료법까지 만들어 낼 계획이다. 이를 통해 세계 어디에서라도 적용 가능한 의료 분야의 AI 서비스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목표다.

AI와 정보통신기술(ICT) 융합, 사물인터넷(IoT)과 같은 신산업 육성에 빅데이터가 ‘21세기의 원유’로 불릴 만큼 핵심적인 자원이 되고 있다. 알고리즘(프로그램화한 규칙)과 빅데이터라는 두 축으로 구성되는 AI 산업에서 구글이나 페이스북 등 전 세계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이미 알고리즘을 무료로 공개하고 있다. 결국 빅데이터를 누가 갖고 있느냐가 승패를 좌우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마윈 알리바바그룹 회장도 최근 “세상은 지금 IT 시대에서 데이터기술(DT) 시대로 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도 이런 점을 인지하고 개인 맞춤형 서비스에 필수적인 개인정보의 활용 규제를 풀려고 하지만 국민의 불신이 커 ‘국회의 벽’을 뛰어넘는 게 쉽지 않은 상황이다.



○ 벤처에 더 불리한 개인정보 규제


숙박 예약 서비스를 제공하는 ‘야놀자’는 최근 호텔이나 펜션 등에서 인근 음식점 정보를 알려주는 서비스를 스마트폰으로 제공하려다가 포기했다.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위치등록사업자로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수많은 서류 작업을 해야 하는데 벤처기업으로서 부담이 컸다. 고객들이 기존에 예약했던 자료를 토대로 숙박 취향을 분석해 추천하는 서비스도 검토 단계에서 접었다. 김종윤 야놀자 부대표는 “새로운 서비스를 추가하려면 기존 회원들에게 개인정보 활용을 위한 추가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1인당 3000∼1만 원의 마케팅 비용이 든다”며 “벤처기업이 새 서비스를 시도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클릭하거나 친구 요청을 하고 수락하는 행위 등 사이버 공간에서 이용자들의 행동을 분석한 ‘개인행태정보’도 한국에서는 활용하기가 쉽지 않다. 이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조성은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 IT 기업들이 개인 행태 정보까지 적극적으로 비즈니스 수단으로 활용할 때 한국에선 개인정보인지 개인 행태 정보인지조차 판단이 어려워 기업들이 사용을 꺼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 ‘글로벌 스탠더드’ 역행하는 한국


ICT 산업계의 규제 완화 요구와 이를 수용하려는 정부 움직임에 대해 시민단체나 정치권 일각은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2014년 KB국민카드 등에서 수천만 건의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등 개인정보 악용에 대한 국민의 불안감이 큰 탓이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해 유럽 일본 등에서는 개인정보를 상대적으로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정책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일본은 개인을 알아볼 수 없도록 하는 비(非)식별화된 데이터를 기업이 사용할 수 있도록 개인정보보호법을 개정했다. 유럽연합(EU) 역시 지난해 유럽 단일개인정보보호법(GDPR)을 제정해 기업이 개인정보를 가명으로 변환한 가명 데이터를 상대적으로 손쉽게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시민단체들은 미국 수준으로 개인정보를 전폭적으로 개방하는 것은 반대하지만 최소한 EU나 일본 등이 추진하는 개인정보 활용에 대한 ‘글로벌 스탠더드’에 접근해야 한다는 점에는 점차 공감하고 있다. 이주홍 녹색소비자연대 사무국장은 “개인정보 활용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여전하지만 무조건 보호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며 “개인 맞춤형 서비스가 성장하지 못하면 결국 소비자 후생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의료 정보 같은 민감한 데이터의 전면 개방이 어렵다면 정부가 몇몇 기업과 협업해 개인 맞춤형 서비스를 개발할 수도 있다. 김재필 KT경제경영연구소 연구원은 “일본 정부가 몇몇 기업과 손잡고 민감한 데이터를 공개해 사업을 공동 추진한 사례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좀 더 구체적인 차원에서 개인정보 활용에 대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단순히 ‘개인정보 활용을 손쉽게 하자’ 같은 원론 수준을 넘어 ‘이름과 집 주소는 우선 동의 없이 쓰고, 언제든 자신의 정보가 어떻게 사용됐는지 확인하게 하자’ 등의 구체적인 안을 놓고 협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송희경 새누리당 20대 국회의원 당선자는 “데이터 공개를 통해 국민이 이익을 본 사례를 널리 공유하고 설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며 “20대 국회에서 개인정보 활용을 위한 법안이 핵심적인 IT 관련 입법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정세진 mint4a@donga.com·곽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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