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G그룹 이의범 회장 “알파고의 승리는 또 다른 인간의 승리”

서정보기자

입력 2016-04-06 17:34 수정 2016-04-06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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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이 바쁜 그에게 ‘속기로 두자’고 했다. 선선히 그러자고 하던 그는 막상 승부에 들어가자 뚝딱뚝딱 두지 않고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 기자의 세력 작전에도 흥분(?)하지 않고 침착하게 실속을 챙기던 그는 조금 불리한 국면이라 여기자 계가를 거듭하며 끈질긴 추격전을 펼쳤다. 승부는 기자의 1집반 승이었지만 그의 집중력과 승부근성에 내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SG그룹 이의범 회장(53)을 최근 경기 판교 SG리슈빌 사무실에서 만났다. 인터넷 바둑 사이트인 사이버오로에서 기자와 똑같이 6단을 둔다고 해 호선으로 대결을 벌인 것.

그는 SG배 페어바둑 최강전을 후원하고 있고, 여자바둑리그에는 SG골프 팀(박지은 루이나이웨이 9단, 송혜령 강다정 초단)으로 참가하고 있는 바둑계의 열혈 후원자다.

서울대 계산통계학과(82학번)를 졸업한 그는 인수합병을 통해 연 매출 1조 2000억 원의 SG그룹을 일궜다. 1991년 생활정보지 ‘가로수’를 창업한 뒤 2000년 상장시켰고 이후 샤프심 제조업체인 마이크로, 자동차 시트 제조사 KM&I, 의류업체 세계물산, 충남방적, 신성건설 등을 인수했다.

“인수합병은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대우차에 시트를 납품하던 KM&I는 연간 100억 원 이상 적자를 기록하고 강성노조가 있던 곳이라 모두 인수를 반대했어요. 그러니까 싼 값에 나왔겠죠. 하지만 납품가만 정상화한다면 회생 가능하다고 봤어요. 강성노조도 겉으론 명분을 내세우지만 속으론 이익을 원한다는 속성을 알고 있어 대처할 수 있다고 봤고요. 서두르지 말고 참고 기다리며 따질 것을 다 따지면 인수합병의 승률을 90% 이상으로 올릴 수 있어요. 이 기업을 못 사면 다른 기업을 사면 돼요. 제일 좋아하는 바둑 격언이 가벼이 서두르지 말고 신중하라는 ‘신물경속’(愼勿輕速)이예요.”

앞서 둔 그의 바둑처럼 사업 원칙도 비슷했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 대결이 역시 화제에 올랐다. 그는 내용적으로 배울 게 많다며 10여분 이상 조목조목 설명했다. 상대 돌을 잡으려고 덤비지 않는 것, 몇 집 손해 보더라도 선수를 잡는 것,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는 것 등 기존에 알고 있던 얘기지만 알파고가 다시 한번 확실하게 보여줬다는 것이다.

“바둑에서 상대 돌 하나를 잡으려면 4개의 돌이 필요하잖아요. 알파고는 상대 돌을 잡으려고 하지 않더라구요. 그게 비효율적이라고 본 거죠. 사업이나 인생도 남을 꼼짝 못하게 잡으려고 하면 안돼요.”

그는 알파고의 승리를 또 다른 측면에서 인간의 승리라고 봐야지, 바둑 승부에서 졌다고 인간의 패배라는 시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것 역시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는 시야가 있어야 가능한 관점이라는 것.

그는 바둑을 특이하게 배웠다. 보통 어깨너머로 보다가 실전을 통해 배우는데 그는 전적으로 책을 통해 배웠다.

“중 3 때 고교 평준화가 되며 입시가 없어졌어요. 시간이 남아돌았죠. 헌책방에서 우연히 본 우칭위안(吳淸源)의 일대기가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1930년대 중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 기사들을 모조리 물리친 이야기가요. 그의 기보를 이해하고 싶어서 기초 책부터 정석 책을 들입다 외웠어요. 나중에 고등학교 때 바둑반에 들어가 테스트해보니 4급이더라구요. 당시엔 아마 단이 없어 1급이 아마 최고수였으니까 지금으로 치면 아마 2,3단 정도 되겠네요.”

이후 대학 시절이나 가로수를 창업할 때 한번도 바둑 돌을 잡지 않다가 거의 25년만인 2004년 다시 인터넷 바둑으로 돌을 잡았다.

“불현 듯 다시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번 두니까 이 좋은 걸 왜 그동안 잊고 살았나 후회가 되더라구요. 바둑에 한번 몰입하면 스트레스 받던 문제를 까맣게 잊게 되는데 바둑이 끝난 뒤 ‘내가 왜 그런 문제로 스트레스를 세게 받았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토요일 밤 늦게까지 인터넷 바둑을 붙잡고 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예요.”

그는 요즘 지난해 세운 스크린골프 업체 ‘SG골프’에 힘을 쏟고 있다. 골프 팬이기도 하지만 세계 최고의 스크린골프 기술력을 갖고 있는 한국 업체들이 너무 국내에서만 싸우고 있다는 것.

“골프존이 국내 시장 75%를 점유한 스크린골프 시장에 왜 뛰어드느냐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해외 시장을 보면 아직 블루오션입니다. 저희가 곧 세계 시장을 위한 비장의 무기를 내놓을 테니까 지켜봐주세요.”

기자는 그가 바둑을 두면서 끝까지 여러 번 계가한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보통 아마추어들은 귀찮아서 계가를 하지 않고 감으로 형세의 유불리를 판단한다.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죠. 요즘 하도 창의력 교육을 얘기하는데, 저는 판단력을 키워주는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판단엔 근거가 있어야 하고 바둑에선 그게 계가죠. 그에 따라 작전이 달라지잖아요.”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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